제2강 가슴으로 하는 대화 2
♥♥♥ 아파트 단지에서 ♥♥♥
큰딸이 2년째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가을이었다. 바람이 이따금씩 가벼이 불고 있을 때, 나는 그 애와 아파트 단지의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은 지가 꽤나 된 아파트라서 단지가 상당히 넓고 화단과 빈 공터는 큰 나무, 그만그만한 나무, 그리고 자그마한 나무로 꽤 많이 들어찼다. 그들은 저마다의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꾸며 단지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그러고 보니 가을은 꽤나 깊어져 있었다. 그때 노랑 은행나무 낙엽 하나가 그 애의 발과 나의 발 사이에 살짝 내려앉았다. 그 애가 그 낙엽을 집어 들었다.
“아빠, 이 가랑잎 참 예뻐.”
“그래, 아주 예쁘구나.”
“아빠, 나도 이 가랑잎처럼 날아보고 싶어.”
“그래? 나도 네가 날아다니는 것 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떻게 날지?”
“이 노랑 가랑잎에 타면 날 수 있을 거야.”
“와, 멋진 생각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니?”
“어제 저녁에 아빠가 요정 이야기를 해주었잖아. 꿈에 그 요정의 양탄자를 타고 내가 하늘을 날아다녔어. 그래서 날아오는 이 가랑잎을 보고 이것 탔으면 하고 생각해본 거야.”
“그렇구나. 그럼 그걸 타고 어디로 날아가려고?”
“저 산 너머로.”
“신나겠다. 저 산 넘어 또 어디로 날아가니?”
“하늘 높이. 달에도 가고 해에도 가고 별에도 가고 싶어.”
“와, 멋진 우주여행이겠다.”
“응. 가랑잎은 내 비행기이고 우주선이야.”
낙엽을 비행기와 우주선으로 이미지를 확장할 줄 아는 큰딸의 말을 들으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6.25가 끝난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고향마을 하늘 위에는 비행기가 자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곤 했다. 아버지가 없던 어린 시절 비행기가 날아갈 때 아빠가 어디 갔느냐고 물은 적이 잇었다. 그러자 엄마는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저 비행기 타고 날아가셨단다. 저 비행기를 타고 꼭 오실 거야.”
어머니 목소리는 잠기었고 비행기가간 하늘 저편을 바라보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소리 없이 우시었으리라. 그때부터 나는 요란한 비행기 소리가 들를 때마다 마당으로 뛰쳐나가 하늘을 쳐다봤다. 비행기가 사라진 산 너머 바라보았다. 언젠가 저 비행기를 타고 아빠가 꼭 오실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비행기가 아무리 많이 날아가도 아버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 때로는 보일 듯 말 듯 아주 높이 흰 꼬리를 길게 남기며 아무 소리 없이 날아가는 비행기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저건 뭐야?”
“종이비행기란다.”
그처럼 높이 날아가는 비행기는 구름 밖으로 은빛 모습을 보일 듯 말 듯 드러냈다. 그건 틀림없이 엄마의 내게 늘 접어주시던 종이비행기였다. 그 비행기의 높이는 나의 꿈이 날아갈 높이였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길은 아버지가 행복을 싣고 날아오실 길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에게 비행기를 접어달라 졸랐고 엄마는 늘 멋진 하얀 종이비행기를 접어주셨다. 나는 그걸 하늘로 높이 던졌다. 그렇지만 종이비행기는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곧장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면 언덕에 올라가 던지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소용이 없었다. 내일 다시 던져야지 하면서 잠자리에 눕는 밤이면,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종이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신나게 참으로 신나게 날아다녔다. 그때의 내 나이만한 저 어린 딸이 가랑잎 우주선을 타고 달에도 가고 해에도 가고 별에도 가는 꿈을 가꾼다. 그 애의 우주선을 타고 나의 그 어린 시절로 날아갔고 싶었다. 그 애처럼 저런 꿈을 꾸고 싶었다.
“재인아, 나도 네 우주선 타고 싶다.”
“응. 태워 줄게. 자, 손님 이제 울 가랑잎 우주선에 탔어요. 어디로 모실까요?”
“저 산 너머 나의 옛날로요.”
“손님, 옛날로는 싫어요.”
“왜요?”
“이 우주비행사는 그때 안 태어났으니까, 타고 가다가 사라지잖아요. 그럼 누가 이걸 운전하고 지금으로 돌아오나요?”
“하하하, 그렇군요. 그럼 미래로 날아가요.”
“알았어요, 손님.”
그렇다. 아이들은 미래로 달리고 싶어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꾸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어른과 이야기하면 옛날이 아쉽고 후회스럽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이야기하면 밝은 미래가 펼쳐진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슴에서처럼 어른의 찌든 가슴에도 꿈이 자랄 수 있다.
“손님, 자 출발합니다. 쌩~. 와, 신나는 우주여행입니다!”
“와, 이 손님도 신납니다!”
큰딸과 우주선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아내가 집으로 오라고 불렀다. 그 후 며칠 지나 유치원에서 연락이 왔다.
“재인이 아빠세요?”
“네.”
“저는 재인의 유치원 선생인데요. 오늘 글짓기를 했어요.”
“네. 선생님.”
“재인이가 동시를 지었는데, 아주 잘 지었어요.”
“선생님께서 잘 지도해주셔서 그럴 거예요. 감사해요.”
“아니에요. 재인과 이야기를 해보니 상상력이 풍부해요.”
“네. 그렇지만 아직은 어린애일 뿐인데요.”
“아빠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나 봐요.”
“…….”
학교에서 배우겠지 싶어 큰딸에게 한글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애의 책 읽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가르쳐주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걸 확인하지는 않았다. 다른 집 아이들은 한글뿐만 아니라 유치원생임에도 학원에 보내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의 수학을 마쳤으니 우리 딸에게도 그러자고 졸랐던 엄마였다. 내가 답을 하지 않자 한글만이라도 가르쳤을 것이다. 그렇게 한글은 깨우쳤다고 치자. 그러나 우리 부부가 가르친 적이 없는 동시를 큰딸이 짓는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좋은 동시를 지었다는 말은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그 날 그 애가 유치원에서 집으로 가지고 온 종이에는 아래와 같은 동시가 적혀 있었다.
가랑잎
가랑잎아
가랑잎아
나를 태워다오.
쌩~
와, 신난다!
비행기도 되고
우주선도 된다.
읽고 또 읽어보았다. 멋지다. 유치원생이 쓴 동시답게 수식어가 전혀 없고 다른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순수 그 자체였다. 아이들의 글은 이래서 좋다. 나와의 대화에서는 달에도 가고 해에도 간다 했지만, 그런 내용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할 말을 다하면 그건 어른의 동시이다. 그러나 어른이 아이들 마음을 가지고 쓴 동시는 완성의 아름다운 동시이겠지만, 아이들이 직접 쓴 동시는 미완의 설익은 동시이다. 미완 자체가 완성인 것이 바로 아이들이 직접 쓴 동시이다. 위의 동시를 읽을 때마다 풋과일 냄새가 싱싱하게 풍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어려지는 것 같다. 이 동시가 나를 풋내 나는 옛날로 태워다주는 우주선인가 보다.
<어른을 위한 시>
가을풍경(2)
늦가을 오후
텅 빈 공원의 긴 의자
지금은 떠난 그녀가
그의 곁에 늘 앉던 자리에
낙엽 하나가 날아와
살짝 내려앉는다.
낙엽이 그를 올려다보고
그가 낙엽을 내려다본다.
마주보고 사그락거리다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낙엽이 남쪽으로 날아가고
그의 몸을 빠져 나온 마음이
낙엽을 따라 날아간다.
껍데기만 남은 그의 몸은
남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서서히 석고상으로 굳어간다.
굳은 석고상 속으로
낙조가 차오르고
낙엽이 떠난 자리엔
바람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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