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가슴으로 하는
대화의 예
천정은 스케치 북이란다.
거기에 도봉산을 그려보고.
코스모스를 그려보고……
제1강 가슴으로 하는 대화 1 : 가족소풍을 다녀와서
제2강 가슴으로 하는 대화 2 : 아파트 단지에서
제3강 가슴으로 하는 대화 3 : 단순한 아이디어를 시로 만들기
제1강 가슴으로 하는 대화 1
가족소풍을 다녀와서 ♥♥♥
우리가족이 도봉산에 소풍을 갔다 돌아와 샤워를 마친 어느 초가을 토요일의 늦은 오후였다. 나와 초등학교 2학년인 큰딸은 그 애의 ‘동화의 방’에 있는 자그마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일몰이 가까운 시간이라 천청의 도배무늬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드리워지는 어둠속에서도 천정도배는 하얀 색깔을 더 강하게 내뿜고 있었다. 나는 어둠과 밝음의 신비로운 조화에 서서히 그리고 한없이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블랙홀이 이런 것일까?
“아빠, 도봉산에 또 놀러가고 싶어.”
그 애의 말에 그 신비로움의 체면에서 깨어나면서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으…응, 참 좋았나 보구나.”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서로 살짝 웃었다. 큰딸의 양쪽 볼에 옴폭 들어간 보조개가 어둠으로 보일 듯 말 듯 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또렷하게 보였다. 그 애를 바라볼 때마다 늘 시선이 멈추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보조개들이다.
“응, 아주 많이 좋았어. 아빠는?”
“나도 좋았어. 근데 뭐가 그리 좋았니?”
“다 좋았는데, 개울가의 큰 바위에 앉아 김밥 먹던 것이 특히 좋았어.”
도봉산 쪽으로 난 창으로 눈을 돌리니 하늘에는 저녁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천정을 바라보았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데, 천정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듯하였다. 그 애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애는 반듯이 누운 채 시선을 천정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방해하기 싫었지만 말을 걸었다.
“재인아.”
“응. 아빠.”
“우리 이야기 좀 할까?”
“아빠, 잠깐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 애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잠시 그 애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계란형의 갸름한 얼굴. 긴 속눈썹과 두툼한 겉눈썹. 목덜미를 휘감아 돌고서도 베개에 수북하게 쌓인 긴 머리카락. 아내가 유산을 몇 번 한 후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갈 때 겨우 얻은 이 딸과 이 순간에 이런 분위기에서 나란히 누워 이야기할 수 있는 나. 그런 나는 얼마나 대단한 행운아인가! 마침내 그 애가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우리들의 눈이 마주쳤다. 일몰 직후의 저녁놀 부스러기가 창을 타고 날아 들어왔다. 내가 씩 웃어주자 그 애의 미소가 그 저녁놀 부스러기를 타고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달콤하다. 늦은 나이에 얻은 어린 딸, 이렇게 늦게 얻은 첫딸을 가져보지 못한 그 어느 누가 이 달콤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
“아빠, 왜 불렀어?”
“지금 뭐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응. 도봉산과 그 바위를 생각하고 그 바위 위에서 재미있게 놀던 일도 생각하고 있었어.”
아까 그 애가 반드시 누워 천정을 바라볼 때, 그 애는 도봉산을 훨훨 날아다니고 그 바위를 오르락내리락 했으리라. 그 바위 아래로 졸졸 흐르는 개울물에 물장구도 쳤으리라. 나도 그 애가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애가 그 모습을 저 어둑어둑한 천정에 그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인아, 도봉산과 그 바위가 눈에 보이는 것 같으니?”
“응.”
“그렇구나. 그럼 저 천정이 스케치북이라고 생각해봐.”
“응? 으∼응.”
“저기에 도봉산과 그 바위를 그려볼래?”
그 애가 눈을 지긋하게 감았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도봉산으로 날아갔으리라. 잠시 후 눈을 떠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활짝 핀 한 떨기 꽃송이에서 두 눈동자가 어둠속에서도 까만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아빠, 다 그렸어. 그 바위 아래 흐르는 개울도 그렸어.”
“그래? 참 예쁜 그림이겠구나.”
“응. 아주 예뻐.”
“나도 보고 싶다.”
“저 천정을 쳐다봐. 저기 있어.”
“난 안 보이는 걸.”
“내 가슴속에 들어와 내 눈으로 쳐다봐야 잘 보여.”
그렇지. 그 애가 태어나기 전 나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그 애가 태어나고부터 그 애의 가슴속에 들어가 그 애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그렇게 본 세상은 내가 보아왔던 것과는 아주 딴판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렇게 하여 피곤하고 찌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었다. 그 애 가슴속으로 들어가 보자.
“네 가슴을 열어줄래?”
“열렸어. 어서 들어와.”
“네 가슴이 닫혀 있는데.”
“내가 웃잖아. 이건 열린 거야.”
“하하. 나보다 말을 더 잘하네.”
“히히. 아빠와 이런 말을 많이 해서 그래.”
“그래. 근데 그 바위 다음에 또 뭐가 좋았니?”
“바위틈에 피어 있던 코스모스 꽃.”
두 개의 바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흙더미에 뿌리를 박은 코스모스 두 그루. 바람이 살랑거릴 때마다 그 가녀린 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 꽃 위에서 내 시선이 춤추고 있을 때, 그 애의 시선도 그 꽃 위에서 춤추고 있었나보다.
“그것도 함께 그려 볼래?”
“이미 그렸어.”
그 다음 날 늦은 오후, 나는 거실에 앉아 랩탑 컴퓨터(laptop computer)를 켜서 ‘녹차를 마시며’라는 사랑에 관한 시를 수정하다가 잠시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파트가 서향이라 거실에서 창밖을 보면 도봉산의 봉우리가 저 멀리 보였다. 도봉산에는 어제처럼 저녁노을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녹차 잔을 집어 들었다. 녹차는 이미 식어 있었고 차가 너무 많이 녹아 씁쓸하였다.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하, 이 녹차처럼 너무 우러나면 사랑도 씁쓸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큰딸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아빠, 지금 바빠?”
“왜?”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
조금 전 생각난 표현을 잊을까봐 그 시의 파일에 ‘녹차처럼 너무 우러난 씁쓸한 사랑’이라는 메모를 남기고 랩탑 덮개를 내리고 옆으로 밀치었다. 다른 일이 생기면 이처럼 잠시 중단하여도 되는 것이 시 쓰기이다. 지속적으로 쓰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있지만, 한참 쉬다가 나중에 쓰면 종전 것보다 더 나은 표현이 떠오르는 수가 많다. 내게는 그게 시 쓰기의 묘미이다. 나는 본래 산문쓰기를 더 좋아했고 소질도 그 쪽에 있다고 느꼈으나 다른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과감히 단념하고 시 쓰기를 택했다. 그 선택이 좋았다고 생각해왔다.
“지금 볼 수 있어. 뭐를 보이고 싶으니?”
“아빠, 이거 읽어봐.”
그 애가 건넨 종이에 적혀있는 글은 이러했다.
천 정
천정은 나의 스케치북
도봉산에 갔다 오면
도봉산을 그려보고
코스모스를 보면
코스모스를 그려보고
침대에 누우면
내 방 천정은
울긋불긋 가을동산
스케치북이 된다.
나는 그 애에게 좋은 동시라고 칭찬해주고 그 애의 이마와 두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 후 큰딸은 위 동시를 큰 종이의 위쪽에 쓰고 그 아래에 자기가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며 도봉산을 상상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 종이를 나무판에 붙이고 벽에 거는 고리를 만들어 내게 주었고 나는 그걸 내 연구실에 걸어놓았다. 지금도 자주 그 동시를 읽고 그 그림을 보면서 그때의 나로 돌아가 도봉산을 돌아다니곤 한다. 세상살이는 힘들지만 그렇게 하여 힘을 얻고, 혼탁한 세상을 보아온 탓으로 흐려진 시선을 말끔히 씻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시력이 좋고 순수한 눈빛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고약한 냄새가 물씬 나는 세상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어른을 위한 시>
녹차를 마시며
석양이 비추는 창가에 마주앉아
그녀와 녹차를 마시고 싶다.
내가 그녀에게 뜨거운 사랑을 붓듯
뜨거운 물을 두 잔에 부으니
언제 왔는지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내 마음에 자기 영혼을 담그듯
녹차봉지를 두 잔에 살짝 담근다.
내 사랑에 그녀의 순결이 풀리어 가고
녹차 향이 그녀의 눈동자에 풀리자
그녀의 미소가 향긋하게 풍겨온다.
녹차를 마시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치자
석양이 물든 건지 부끄러움이 물든 건지
그녀의 얼굴이 불그스레하고
까만 눈동자가 샛별처럼 아름답다.
“사랑해”하고 그녀의 손을 잡는다.
순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그녀의 잔에는
녹차봉지가 그대로 잠겨 있고
그녀는 간데온데없다.
사랑이란 녹차를 마시듯
아무런 말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입맛을 다시며 느껴야 한다.
설탕처럼 달콤한 사랑을 즐기려고
사랑한다는 말을 섣불리 하는 순간
녹차가 너무 녹은 그녀의 잔처럼
그녀의 맘을 씁쓸하게 만들고
다 마신 나의 빈 잔에는
다 우러나서 아무런 맛이 없는
칙칙한 녹차 부스러기 몇 개만 가라앉고
사랑을 다 쏟은 나의 마음에는
까만 기억 부스러기 몇 개만 가라앉는다.
'딸아, 아들아 이렇게 글을 써보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편 제5강 실마리를 찾아라 (0) | 2015.12.02 |
---|---|
제2편 제4강 왜 감상적인 대화인가? (0) | 2015.12.02 |
제1편 제3강 가슴으로 하는 대화 3: 단순한 아이디어로 시 만들기 (0) | 2015.12.01 |
제1편 제2강 가슴으로 하는 대화 2 (0) | 2015.12.01 |
들어가며 (0) | 2015.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