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밤에 있었던 일
--신판 처용가--
마른번개가 두어 번 번쩍이니 마른천둥이 무지개 한 번 뜨지 않던 서라벌 밤하늘을 뒤흔들자 북두칠성이 우수수 별똥별로 떨어져 개꿈 꾸던 일곱 마리 똥개의 이마에 하나씩 박히더라 이 밤 웬 불꽃놀이인가 긴 겨울잠을 자던 떡두꺼비 세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 나와 놀란 큰 눈만 껌벅이다가 뱀꿈을 용꿈으로 착각하여 승천하다만 능구렁이에게 그만 목덜미가 잡히고 말았지 능구렁이는 다시 미친개들의 이빨에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지는 그야말로 그해 겨울 들판은 개들로 개판이 되고
미친개를 달래는 데는 고깃덩어리가 그만인 줄 알지만 비쩍 마른 겨울 살림에 그런 것이 어디 있어 전전긍긍하는 딱한 처용들을 보다 못해 시집 안 간 처용의 처들이 서라벌 강남땅 밤하늘에 흩날리는 지폐로 은혜를 받으면 뜯긴 부위에 먹지 않아도 이내 살이 통통 찐다는 잔털 보송보송한 이팔청춘들은 가장 부드러운 속살을 통째로 고기로 내어놓고 말았지 요조숙녀일수록 속살에 못이 박히면 눈이 뒤집히나 봐 이게 웬 횡재인가 개 이마에 박힌 건 단지 금박을 입힌 똥별인데 "내 금목걸이 내 금가락지" 현란한 서라벌 밤에 미친개를 끌어안고 뒹구는구나
두 다리는 내 것인데
두 다리는 뉘 것인가
구멍난 하늘에서는 축복처럼 진눈깨비는 펑펑 쏟아지는데…
봄비는 하늘에서 말씀으로 내리는 게 아니라 짓밟힌 땅에서만 샘물처럼 솟는 반항이지 날이 풀자 너도나도 몽둥이를 들고 벌판에 몰려나와 개몰이꾼이 되자 잠시 이빨을 드러내고 허세를 떨다가 이내 꼬리를 내리고 낑낑거리며 오금싸는 똥개들을 잡아 뽕나무에 매달아 그을러 보신탕집에 끌고 가 목 따로 다리 따로 걸어놓고 이 살짐 저 살짐 졸깃한 살점을 찢어다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놓고 잔치를 벌인 거야 개고기 살점을 질겅질겅 씹으며 두꺼비를 입에 문 채 용 되다 그만 개 이빨에 동강난 능구렁이들을 주워서 담은 이미 십여년 묵은 섬사주(蟾蛇酒)를* 개 이마에 박힌 그 똥별을 뽑아 녹여 만든 술잔을 기울이며 육자배기 노랫가락이 흥겨운데….이 일을 어찌할까 아직도 시집 안 간 처용의 처들이 개새끼를 유복자로 낳으니 아 불쌍타 우리 처용이여 늦자식에 기쁜 나머지 그대 아는지 모르는지 금기줄에 은종이 금종이로 북두칠성을 만들어 고추와 고추 수껑과 수껑** 사이사이에 끼워놓고 "역신아 물러가라 역신아 물러가라" 덩실덩실 때 아닌 굿판이 벌어졌으니
그때 떨어졌다던 북두칠성은 아직도 저렇게 서라벌 어둔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데 처용은 요사이 북두칠성 일곱 모두를 자랑스레 이마에 박고 마른하늘 거들먹거리며 노니는 이미 씨 마른 지 오래된 똥개꿈을 자주 꾸어 봄잠을 설친다
1993.2.25(대통령 취임식)***
*섬사주(蟾蛇酒): 두꺼비를 잡아 삼키고 있는 구렁이로 만든 술
** 수껑: 숯의 경상도 사투리
*** 이 시는 문민정부의 대통령 취임일에 쓴 것으로 군사 독재를 한 신군부, 소위 서울의 봄의 3김씨, 민주화운동 등을 노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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