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아, 뉴욕이여!
뉴욕은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던 도시이다.
나를 좋아하던 흑인 제자들도 기억한다.
비록 내가 손도 잡아주지 않았지만, 나를 그토록 사랑한 백인계 혼두라스 학생 Anida Sandoval에 대한 추억이 지금도 나의 가슴을 저민다.
수화(手話)
- 모국어여! -
벼르고
망설이다가
바람결에
속삭여 본
나의 노랑 음절들은
흰둥귀와
검둥귀를
아득한 메아리로
맴돌기만 하다가
내 심장으로 돌아와
어금니를 깨무는
아픈 신음으로
밤새
뜨겁게 뜨겁게
오열하고는
마침내
빈 하늘을 향하여
휘젓고 휘젓는
바람개비 같은
저 손가락 끝에서
서럽게
서럽게
몸부림친다.
*작시 후기: 이 시는 미국서 MBA(경영학 석사) 학위과정의 유학 첫 학기에 알아듣지도 못 하는 너무나 어려운 영어 때문에 손짓발짓하던 것으로 소통한 것을 생각하여 노래한 시다. 우리 시대는 영어를 그렇게 못하고 유학 간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나는 피나는 노력을 하여 1학기 지나서 바로 어느 정도 토론이 가능하도록 영어가 늘었다. 문장 쓰기 능력이 좀 있어서인지 영작문에 상당히 자신이 있다. 그때 미국인과 공동연구를 해 영어논문을 쓸 때 내가 쓰고 그가 문법을 봐주는 식이었다. 그런데 내가 쓴 부분은 편집자가 전혀 고치지 않는데, 미국인 공동연구자가 고친 부분은 지적을 당하여 고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내가 자기보다 더 잘 쓴다고 했다. 그럴 리 없지만 그렇게 우리는 좋았는데, 지금은 그가 살아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귀국 후 몇달 만에 내 지갑을 소매치기 당해 전화번호 수첩도 같이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나와 동년배인 그가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 지금도 외국 책은 번역오류가 많아 원서로 읽는데, 이것도 일종의 지속적 영어를 공부하는 방법이라 보면 된다. 영어가 안 되어 미국서 박사를 해도 미국서 교수를 못하고 돌아와 국내의 좋은 대학의 교수가 된 사람이 많다. 나처럼 미국서 교수하다 나중에 돌아와 실력 있는 사람이 지원하면 그들은 교수채용 심사자가 되거나 또는 학과의 대장 노릇을 하여 실력자를 배제시키는 평가기준을 만들어 배척하는 경우가 그제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그런 실력자는 연구시설이 열악한 대학의 교수로 가기만 해도 다행이다 하듯이, 아예 설 자리가 없기도 하다. 나도 서울 근교 지방대학에서 교수를 했는데,그곳 가기도 어려웠고 가서도 늘 관심병사 수준이었다. 학교 돈으로 해외 여행가고 등 그런 거 하지 말라는 정부에서 자제도 소용 없다. 세미나 연다고 하고 가서 그런 대학교에 형식상 들리기만 하면 세미나로 둔갑하고 만다. 나는 그런 여행은 가지 않거나 기타 잘못된 거 고치려고 노력하였으니 학문에 뜻이 없고 젯밥만 노리는 그들에겐 내가 눈의 가시일 터이니 관심병사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게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못 타는 주된 이유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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