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2): 기타 건강 관련 문제

더위도 세상도 이기며 사는 법

매미가 웃는 까닭 2016. 8. 10. 21:35


더위세상도 이기며 사는 법



(1) 들어가며


건강하여야 세상(일)도 잘 견딘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덥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런 더위로는 몇 년만에 최고라든가 떨어더 댄다. 그러나 나는 이런 더위는 우리가 어릴 때 시골에서 땡볕에 보리타작을 하면서 늦은 봄에 참아온 더위나 여름의 더위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이와 유사한 더위에도  못미치는 것 같다. 시골에는 전기도 안 들어와 호롱불로 공부하던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나는 더위를 잘 견딘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도 잘 견딘다. 이처럼 더위를 잘 견디는 건 몸이 건강함을 의미한다. 세상을 잘 견디는 것은 정신적 건강을 의미한다. 몸이 건강하고 정신이 건강하면 어떤 더위도 잘 견딜 수 있다. 나아가 세상일도 잘 견딜 수 있다.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은 더위를 잘 견디는 몸과 정신 건강법은 어떤 것인가? 그걸을 이야기 해보자.


(2) 더위 견디기


더위를 잘 견디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더위를 없애준다.

2. 더위를 무시하는 체질을 만든다.


위의 1은 에어컨을 틀거나 선풍기를 트는 방법, 찬물 목용 등이다. 이때 전기를 사용하면 요새 논란 많은 누진적 전기료를 지급해야 한다. 누진제로 손자를 위해 에어컨을 틀었다가 40만원 넘게 전기료가 나온다는 보고도 있다. 현행 누진제는 적게 쓰는 경우와 많이 쓰는 경우 사이에 요금차이가 11배라는 보도도 있다.


나는 2의 방법으로 전기도 아끼고 더위도 이기는 나만의 방법을 사용한다. 주말과 같이 집에 있는 날 나는 햇볕이 가장 센 낮 12시와 2시 사이에 산책을 나가 거리를 3-4시간 돌아다닌다. 물통을 베낭 옆쪽에 차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차만 보이고 걷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시간대에 무작정 을 걷는다. 유산소 운동이라거나 땀을 내도록 빨리 걸어라거나 뒷꿈치부터 땅에 닿도록 걸으라 하는 등의 걷기기준은 아예 무시한다. 그런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날은 이처럼 더운 날은 아닐 것이다. 그런 기준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 아무런 기준을 두지 않고 그냥 무작정 걷는 게 유일한 기준이다. 큰 거리를 가다 골목길이 있으면 그 골목으로 들어가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린다.


그렇게 걷다가 그늘을 만나면 잠시 쉬었다 걷기도 한다. 더운 여름 낮 시간대에 이렇게 걸으면 땀이 비오듯 흐르고 몸은 땀범벅이 된다. 물도 아주 필요할 때만 마시지 자주 마시지 않는다. 이런 더움에 땀투성이, 물마시고 싶은 욕망에서 참는 것 등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몰론 아주 갈증이 심하면 마신다. 그렇게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걸어다니다 집에 와 찬물로 샤워를 하면 그냥 행복하다. 찬물로 감자기 하는 게 아니라 손을 그 다음에는 팔을 찬물에 노출시키고 난 한참 후 찬물이 몸에 닿도록 한다. 갑자기 천물에 몸을 노출시키면 발생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이다.


아는 사람이 내게 말한다. 그렇게 하면 얼굴이 탄다. 자외선을 조심하란 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외선을 걱정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시골에서 사는 분들이 자외선 때문에 피부노화가 심해 같은 나이의 도시 사람보다 더 늙어보인다. 나는 도시에 살기에 피부가 늙을 만큼 자외선에 노출되지 않는다. 이런 산책을 매일 하지 않고 하다마다 한다. 그래서 피부가 노화될 만큼 장시간 자외선에 노출되지 않는다. 


자외선을 많이 쬐면 피부암이 걸린다고 하는 의사가 많다. 생활습관으로 암이 걸리게 하는 확률이 20%니 뭐니 한다.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말은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한다. 이 말은 그들은 통계적인 간접 증거로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1,000명의 피부암 환자에 대해 설문을 하지나 진료기록을 조사하면 약 20%의 사람의 생활습관이 나빴을 것이다. 이는 통계적으로 인과관계를 조사한 간접적 방법이다. 만약 그 중 암의 가족력을 가진 환자가 5%라면 5%만이 가족력에 의해 암이 발생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위와 같은 조사에 오류가 있다. 첫째 오류는, 좀전 말했듯이, 그 결론은 간접적 방법으로 조사해 내린 인과관계를 말하지 직접적으로 인과관계를 밝힌 결론이 아니다. 간접적인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직접적 관계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활습관으로 암이 발생한 20%의 환자 중에는 밝혀지지 못했지만 분명 가족력으로 암이 걸린 사람이 대부분이라 생각한다. 조사상 오류이거나 아니면 진술상 오류가 많을 것이라 본다. 특히 가족력이 없더라도 그들이 걸릴 확률이 높은 암세포를 가지고 있는데 생활습관이 나쁘면 암에 걸릴 확률을 높아진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나는 암이 생활습관으로 걸린다는 데 동의할 뿐이다. 다시 말해,  생활습관을 바르게 함은 암의 발병을 늦출 수는 있을 뿐이지 시간 문제라고 본다. 극적으로 가족력이 친가이든 외가이든 부모이든 친조보이든 외조부모이든 가족력이 암발생의 원인일 가능성을 나는 믿는다. 이게 나의 신념이다. 물론 잘못된 신념일 수도 있지만 맞을 신념일 수도 있다. 과학적으로 그걸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건 생활습관을 고치면 그 기간을 늦출 수 있으니 생활습관을 바로 하는 건 중요하다.


위에서 말했듯, 나는 낮 중 가장 더울 때를 의도적으로 골라 거리를 걷는다. 이렇게 내 피부와 몸이 더위에 적응되어 그런지 걸을 때 땀은 많이 흘리지만 더위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 안 덥기야 하겠나만 심리적으로 안 느끼는 성향을 개발하니 더위를 느끼지 않는다고 본다. 이열치열이란 이처럼 체감더위가 낮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나는 군대에 가서 이런 습관과 정신무장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군대 갔을 때는 훈련소 시설이 빈약해 샤워 시설은 없고 가뭄에는 세수할 물이 잘 나오지 않는 수도시설을 가진 시대였다. 내가 입대한 날은 6월 29일이라 기억되는데 훈련 기간 중 정말 아주 한 여름이 되었다. 그해는 가뭄도 심했다. 그래서 점심 후 맨발로 걸아디니면 발바닥이 더위에 익을 정도로 뜨거웠다. 더구나 점심시간이 끝나고 훈련장 땅바닥에서 엎드려 포복하거나 사격 연습을 하거나 하면 낯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모두들 힘들어했다.


나는 각오를 달리했다. 내가 이 더위를 못 견디면 저 험하고도 저 뜨거운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동료 훈련병들은 그 더위를 견디지 못한다 해도 나는 그런 각오로 훈련을 쉽게 받았다. 군대를 그렇게 보내고 사회에 나와서도 나는 더위도 추위도 잘 견디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고 더위도 추위도 잘 안 탄다고 한다. 그런 거 안 타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도 사람이라 더울 때 덥고 추울 때 춥다. 잘 참을 뿐이다. 견디는 심리적 훈련을 나 스스로 한 덕에 지금도 여름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 선풍기도 별로 틀지 않는다. 겨울에는 난방비도 많이 들지 않고 이번 여름 전기료 폭탄도 10,00원 조금 넘을 뿐이었는다. 다마느 손님이 왔을 때만 좀 틀었을 뿐이다.



(3)  몸 및 정신의 건강과 사회살이



누구나 다 위에서 말한 대로 나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위나 추위에 몸이 적응하도록 하는 심리적 훈련이 그 동안 나만큼 안 되어 있을 테니 나 같이 하면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병이 날 수도 있다. 나 같이 바로 하지 말고 어느 정도 극기 훈련을 하여 익숙해지면 나 같이 해보면 어떨까 권하고 싶다. 그럼 더위는 물론 추울 때도 견디는 힘을 기르리기 위해 일부러 가장 추울 때 나들이 가면 잘 견딜 수 있음은 물론이다. 내가 아주 젊을 때는 겨울에도 찬물로 온몸을 씻었지만 나이가 들자 심장이나  피돌기에 문제가 발생할까봐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요새 젊은이도 심장마미가 오는 시대이므로 나이 들어가면 갈수록 때로는 조심해야 해서 어릴 때처럼 겨울에 찬물 샤워를 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아침에 일어나 먼저 찬물로 세수를 한다. 그 다음 런닝셔츠 바람으로 15-20분쯤 추운 바깥을 돌아다닌다. 이때 머리에는 모자를 쓴다. 머리에 피돌기에 지장이 있으면 큰 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후 역시 바깥에 나가 바람이 불든 눈이 오든 추위를 잘 견디면 30분 가량 바깥을 돌아다닌다. 역시 모자를 쓰고 말이다. 그리고 나서 집에 들어와 그 날 할 일을 준비한다. 그러면 스트레스 안 받는 습성도 저절로 길러질 것이다. 감기도 잘 오지 않는다. 감기가 들어도 나는 의사를 찾아가지도 진통제도 먹지 않고 자연히 낫게 한다. 그게 버릇이다 보니 감기를 걱정해본 일이 없다. 독감주사를 맞아본 일도 없고 폐련 주사를 맞아본 일도 없다. 이게 잘못인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별 문제가 없이 건강하게 산다. 


더운 날씨나 추운 날씨에도 그렇게 사니 세상 살이도 그만큼 쉬워진다. 말하자면 군대에서 훈련하며 날씨를 견디는 자세가 스트레스가 많은 한국의 사회살이도 잘 타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된 듯하다.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 성격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 직업에 충실하면서 할 말 하고 산다. 세상 사람들에 구차하게 눈치보고 살지 않는다. 뭐 한 자리 할까 욕심내지도 않는다. 미국에서 교수도 하고 우리 분야에 외국 대학원 교재에 내 이름이 나오지만 그걸 내세울 생각도 않는다. 그냥 내 분수를 지키며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산다. 실력만 갖춰놓으면 그렇게 살 수 있다. 이런 삶에는 건강이 사전 필수과목이다.



(4) 나의 실력을 배양하고 남의  특성을 인정하자


앞에서 말했듯, 스트레스 안 느끼는 위와 같은 내 삶을 살려면 실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실리콘 벨리에 가면 우리 기준으로는 다 괴팍한 사람들로서 세상살이를 할 사람이 많다. 그러나 거기서는 그런 사람이 제대로 대우를 받는 수준을 넘어 우대를 받고 산다. 우리 같으면 왕따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주군이나 윗사람에 아부하고 비비고 부정에 협조하다 못해 앞장구와 뒷장구를 치면서 승승장구한다. 그걸 출세라고 한다. 어느 정부의 홍*과 우* 같이 말이다. 그렇게 벤츠나 BMW를 몰고 다니다가 일이 생기면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이* 같은 사람이 너무 많다. 노무현의 정부 때도 그렇게 목숨을 잃는 서울대 출신이 있더니 노무현 자신도 목숨을 잃은 슬픈 자화상이 우리나라에는 좀종 일어난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수사를 하다가 기업 총수인 성**도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매 정부마다 목숨 버리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나 전두환 때는 정부에서 목숨을 끊어버렸지만 그 후에는 스스로 목숨 버리는 경우가 심심 찮게 일어난다. 가족의 재산을 지키기를 했건 자기 조직을 위하려 했건 주군을 위해서 했건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했건, 하나뿐인 목숨을 버린 사람들이 대단해 보이지만 어쩐지 맘이 씁쓸하다. 그러나 고인들에게  명복을 빈다. 아물러 그 고인에게는 지금 와서는 늦어 미안하지만 좀 부족하더라도 자기 소신대로 정직하게 자기 삶을 살았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위와 같은 일은 다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탓으로 생긴 불운이다. 바른 정신으로 자기 실력을 키운 사람은 그런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자기 실력만 있고 남의 일에 콩놔라 팥놔라 하지 않으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에서도 왕따 같지만 왕따 아니게 살 수 있다.나처럼 말이다. 누구도 그런 나를 잘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를 피하지도 않고 필요할 때 이야기도 나눈다. 내게 의견을 물어보기도 하고 학문 개념을 모를 때 자문해 오기도 한다. 미국에 대해 모를 때 영어에 대해 모를 때 많이 묻곤 한다. 그래서 나는 사귈 사람을 내가 선택하지 남이 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내 주위에는 많지는 않지만 괜찮은 사람도 더러 있어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 


편한 미국에서 교수하며 살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나도 처음엔 스트레스를 엄청 많이 받았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었다. 실력이 부족한 교수가 대부분이라 연구할 시설 등 하드웨어적(물리적) 인프라도 없고, 연구할 실력, 마음가짐 등 소프트웨어도 없는 대학들이었다. 그렇지만 그걸 불평해야 소용 없다. 그들을 실력 없다 탓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 심정을 건드리지 않으면 말이다. 그래서 연구대신에 책의 저술로 돌렸다. 책쓰는 건 대단한 연구나 실력을 요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책이란 글솜씨가 좀 있으면 아는 지식을 종이에 담으면 된다. 교재는 더욱 낮은 실력으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저술 쓰는 것을 우리는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건 아마 옛날에 좀 문장력이 있어 학자로 존경 받으면 문지을 남기는 전통 때문일 것이다. 그 문집에 대해 말을 좀 하자.  이황도 문집을 남기고 이이도 문집을 남기었다, 그걸 요새 누가 읽는가? 정약용의 목민시서를 몇 장 읽으면 차라리 도덕경을 읽는 게 낫지 싶다. 이순신을 내가 존경하지만 난중일기에 좀 더 나은 이야기를 문장력 있게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은 글이다. 옛날의 문집은 대부분 시나 산문 기타 처세술에 대한 것이고 사회과학이라고도 하기에 부족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책 쓰는 일은 문장력만 있으면 된다. 오늘날의 책쓰기는 시문이 아니라 과학적인 분야는 그 분야의 책이다. 그런 수준 중 학부 책은 학부수준의 낮은 수준의 학문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책 저술을 너무 높이 살 필요가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남의 책을 짜깁기 하는 수준이 아닌가? 내책을 짜깁기 하여 쓴 책도 많다. 이런 건 저작권 침해인데 사법권을 믿지 못해 고소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좀 베끼는 것은 있을 수 있는데 ,그걸 무넺 삼으면 문제 삼으면 그게 입소문으로 퍼져 오히려 문제 삼는 자의 책이 팔리지 않아 출판사가 힘들어 한단다. 그러면 올바른 책을 낼 기회조차 없어진다. 책 내는 자들 대부분은 사실상 저작권의 범법자이다. 그런 범법자가 없는 미국에서는 책 쓰는 사람은 학문이 깊은 그 학문의 대가가 아니라 낮은 실력수준을 가진 사람들이다. 교과서 책의 내용은 그만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학문발전을 위해 서울대에 대해 몇 마디 하고 싶다. 지금은 서울대가 전보다 많이개선 되었지만 재직 교수가 최고의 교수 같이 일반인은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내 분야에도 대부분 나보다 나은 교수가 거의 없다. 일부는 연구실적이 있다 해도 그게 대다수 수준 낮은 게 대부분이고 그들 밑에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들의 논문도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다. 요새는 한국의 위상이 높아 우리의 자료로 논문을 쓰면 게제가 쉬워지는 혜택을 받아 오국 학술지에 나오는기는 한다. 미국에 비하면 말할 수 없는 정도로 대체로 수준이 낮은 연구라 보면 된다. 내 분야가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내 이웃분야는 그개 더 심하다고 알고 있고 그 이웃의 이웃분야도그렇다. 노벨상을 타는 분야에서 노밸상 하나도 못 타니 이들 역시 50보 100보이지 않을까 한다.


내가 국내에 들어온 시점에서는 실력이 좀 있고 자기 목소리를 내면 서울대에 가기는 애초부터 자격 미달이었다. 지금은 조금 개선 되었지만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목소리를 죽이고 거기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친하여 점수를 따려 노력해야 한다. 실력이 아니라 기존들에게 잘 보이여야 한다는 그곳에 갈 가능성을 높인다. 요새 추세에 맞게 외국 학술지에 조금은 연구논문이 있어야 함이 내가 귀국한 ㄱ시점과 조금 다를 뿐이다. 사람들과 친하는 건 인성을 말하니까 그게 정상이지 않느냐구? 미국에서는 한국 판단 기준으로는 자격미달이지만 학문수준이 높으면 더 많은 월급 더 높은 지위를 주고서라도 모셔가는 곳이다.


미국에서 인성을 전혀 안보는 건 아니지만 아주 똑똑하고 실력 있으면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걍우를 많이 보았다. 일부러 사람을 건드리지 않으면 너나나나 인성은 차이에 없는데, 한국에서는 남을 건드려 인성 테스트를 하는 사회라고 보면 된다. 개선은 되었지만 지금의 채용방식과 교수들의 학문수준으로는 우리나라 학문이 늘 그 모양 그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서울대를 거론해 말하는 이유는 서울대가 우리나라의 학문 수준을 높이는 중요한 지위에 있기에 그 대학이 어떻게 하느냐가 우리 미래의 학문 내지 우리자라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존 교수들이 그런 역할을 다 하지 못하다는 게 안타깝다는 말이다. 우리 분야에서는 학문에는 뜻이 없고 사외이사나 기타 이권을 밝히는 사람도 많다. 외국 같으면  좋은 교수가 그가 몸담은 대학을 유명하게 하는데 우리는 유명대학이 별볼이 없는 교수를 대가처럼 만드는 문화에 있다. 이런 문화가 서울대를 서울대 역할을 못하도록 하여 안타깝다.


왜  더위 이야기나 건강 이야기를 하다가 대학 비판을 하는가? 난 그런 대학이나 내가 몸담았던 대학의 보직이나 기타 이권에는 별로 탐을 내지 않고 내 할 일만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건강ㄷ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문화인 한국사회에서는 그냥 안 될 일을 탐하면 나만 망가진다. 그 왜 이솝이야기에 쉰 포도 이야기가 있지 않는가! 여우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머리 위 나무에 잘 익어 먹음직한 포도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따먹고 싶어 몇 번 뛰어올라 보았지만 좀 높아 못 따먹었다. 그러자 그는 저 건 쉰포도라고 하고느 포기했다는 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위선(hyprocracy)이라는 이야기이다. 사실은 먹고 싶어도 못따 먹으니  자기 능력 부족을 인정하지 않고 포도는 쉰 것이라 안 따먹는다는 식으로 위선을 부렸다는 말이다. 나의 경우, 서울대에 가고 싶지만 그 대학은 형편 없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솝 이야기에 여우가 포도를 먹기나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안 따먹는 게 오히려 잘된 일이다.  마찬가지로 서울대에  내가 가면, 학교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더 스트레스 받아 일은 일대로 안 되고 나의 몸과 정신 건강만 해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거기 안 가는 게 더 나아 위선이 아니라는 게 내 결론이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를 욕심내지 않고 편하게 산다. 이처럼 매사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 습성을 길러 그냥 편하게 산다. 



(5) 결구(concluding remarks)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다 나같이 살 수는 없다. 더러는 그레다 죽고 그러면 언넨가 누가 그 일을 해낼 수도 있다. 그래야 자기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나 같은 방법은 불교의 중들이 그냥 자중하자 자중하자는 식의 사고에 대당하고 패배자의 포기적 사고에 해당할도 모른다. 각자 알아서 하되 나 같은 방법도 그 중 하나라 말할 뿐이다. 나처럼 살기도 쉽지 않다. 우선 자기 분야에 실력을 갖추아야 하고 그것으로 안 될 때 포기할 줄도 알고 그런 포기 등 어떤 데 미련을 두지 않을 만큼 내공이 필요하다.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 습성도 개발해야 한다. 그럴려면 먼저 더위나 추위를 참는 극기 훈련부터 시작하기 바란다. 그러면 모든 것에 초연해질 수 있는 정신건강을 기를 수 있는 첫 단계인 몸건강을 갖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