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논어, 도덕경 등)

음양오행설의 비판

매미가 웃는 까닭 2016. 5. 23. 11:59


 

음양오행설의 비판

 

(1) 음양오행설이란?

 

1) 음양설의 개요

음양오행설은 음양설과 오행설이 독자적으로 개발되었다가 전국시대의 추연이란 사람에 의하여 합쳐진 이론이다. 음양설이란 우주만물의 모든 것들이 음(陰)과 양(陽)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이다. 예컨대, 명암, 고저, 남녀 등에서 보면, 밝음이 양이고 어둠이 음이고, 높은 곳은 양이고 낮은 곳은 음이며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내가 양(음)이면 내 평생 반려자인 그 반대는 음(양)이 되어 그와 나는 음양의 쌍이다.

나아가  여기의 반려자가 아니라 우주 어딘가에는 나와 음양이 다른 나(반나, 영어로 anti-me라고 하자)의 짝이 있는 것인가? 그런 반나가 있다면 어서 그를 만나보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대의 반나가 우주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있다면 여러분도 그를 만나보고 싶으리라.

음과 양이 상보적 (서로 보완적)으로  생성/ 확장되고 또는 서로 대립하여 소멸 /축소하는 방식으로 우주만물이 운행한다는 게 음양론이다. 현대 과학에서도, 음양설이 말하는 방식으로, 우주만물이 생성/확대 또는 소멸/축소 하는 듯하여 이 음양론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단지 맞는 것 같다라고 말하였을 뿐 맞다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맞는 듯하지만 정확하게 맞지는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를 알려면 아래를 계속 읽기 바란다. 

 

2) 오행설의 개요

 우주만물은 음양으로 생성/확장 또는 소멸/축소하여 운행하는데, 그 운행을 하는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5가지 근본요소가 있는데, 이들은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이다. 이들 5요소가 서로 음얄론에 따라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운행한다는 이론이 바로 오행설이다. 이 상호작용울 운행(運行)이라 하며 이 운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아루어진다. 그 하나는 이들 오행이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확대시키는 상생작용(相生作用)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 오행이 서로 적대적으로  작용하여 상대방을 소멸/축소시키는 상극작용(相剋作用))이다.  

 

상생작용에서는 5가지 요소인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순서 대로 서로 보완적으로 생성 및 확대를 하는데 이를 두고 오행상생(五行相生)이라 한다.  예컨대, 물(水)과 흙(土)이 상생하여 나무(木)를 만들어 낸다. 반면, 후자 즉, 상극작용에서는 토목금화수(土木金火水)에서 뒤에 있는 것이 앞에 있는 것을 소멸  및 축소시키는데, 이를  오행상승(五行相勝) 또는 오행상극(五行相剋)이라 한다. 예를 들어, 위의 순서를 보면 금(金, 쇠)이 목(木, 나무)의 뒤에 오는데, 뒤에 오는 쇠가 앞에 오는 나무를 소멸 또는 축소시킨다. 즉, 쇠로 만든  도구인 칼, 도끼, 낫,  톱 등으로 나무를 잘라 버려 축소 또는 소멸(죽임)시킨다. 그래서 목에 대하여서는 금이 상극(相剋)이 되며 이를 금이 목을 이긴다 하여 상승(相勝)이라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인 상극이란 이 오행설의 용어이며 사람 간에도 상극인 사람도 있고 음식 간 에도 상극인 음식아 있다고 한다. 글쎄다. 음식에서는 함께 먹으면 안되는 게 있는데 이는 성분  때문이지 그 음식의 재료 간 상극 때문은 아닌데도 그렇다고 한다. 이를 보면 사람 간, 음식 간 상극이니 하는 말은  경험에 의하여 추론한 것으로 과학을 모르던 시대의 무지한 발상이다. 그러고 보면,  오행설을 믿는 사람(상당수의 한국인)은  아직 원시적 시대에나 가지는 생각으로 현대에 산다고 할 수 있다.

더 한심한 곤 그런 비과학적 개념인 상극으로  인간 운명의 길흉에 대해 점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말이 안 되지만 그게 지금의 현실에서 흔히 접하는 게 우리네 실상이다. 현재 길거라에서나 미아리에서 많은 점쟁이와 역술인을 볼 수 있다.  이런 발상이 왜 원시적 발상인지를 알려면 아래를 더 읽어보기 바란다.
 

(2) 음양오행설에 대한 비판

상술한 것에서 보듯, 음양오행설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에 관한 동양철학의 이론이다. 이는 심오한 이론인 듯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미개한 생각의 소치로서 무식한 자가 만든  이론이란 게  나의 견해이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음양오행설은 맞을 듯 하다. 왜냐하면 쇠로 목을 자르면 소멸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듯할' 뿐이고  엉터리 이론이란 게 내 주장이다. Stay tuned(나가지 말고 계속  읽어보시라)!
 
1) 음양설의 비판
동양문화에서는 고대는 물론 심지어  현대까지도 어떤 대가(大家, 큰 인물)가  이론을 형성해 놓으면 그 다음에는 그 이론의 틀 안에서만 머물로 고작 그 이론을 보완하거나 다소 추가할 수 있을 뿐, 그 아론울 뒤집거나 하는  반기를 들 수가 없다. 따라서  그 대가의 이론과 대립되는 아론울 생각할 수조차 없어서 그 이론을 학습하고  그걸 후학들에게 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3강 5륜이니 뭐니 하는 것으로서 그런 도덕적 잣대로 후학의 운신을 좁게 만든다.  그 결과 후학들은 그 대가가 정한 틀을 벗어나는 이론을 개발하지 못하여 학문은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문제를 벗어나는 힘을 가진 더 큰 대가가 나타나지 않는 한 그렇다. 이를 테면, 주자가 유학을 보완하여 낸 주자학이 수백년 지배하다가 청나라 때 다른 대가가 양명학을 개발했다. 그러나 그건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동양에서는 공자사상의 틀 안에 있는 주자학이 여전히 대세를 이루었다. 공자 이상의 대가, 아니 공자보다는 못하더러도 주자 이상의 대가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바로 음양설아 대가인 선학이 만든 이론을 후학이 타파하거나 다른 각도로 보지 못하고 그 틀에서만 보아야 하는 예이다.

그런데,  우주만물에는 음양의 쌍이 존재하는 것이 많아,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도 음양설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음양설에서 상정하지 못한 것으로서 음양의 쌍 외에도 중간형태의 것이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전자와 양자의 중간에 중성자라는 것이 있다. 그 중성자는 핵분열형 핵폭탄(원자폭탄, 융합형 핵폭탕인 수소폭탄은 아닌 폭탄)이라는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다.

양자는 양극이라는 전기력으로 서로 밀어서 물건 속에 못 들어가지만 전기성질이 없는 중성자가 원자핵 속으로 뚤고 들어가 원자핵을 분열시키어 엄청난 퍽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우랴늄 235로 만들어지는 분열형 핵폭탄이다. 물론 융합형 핵무기인 수소폭탄이 터지려면 1억도 정도의 열이 필요하니 이런 열을 단숨에 내는 수단은 분열형 핵폭탄을 터뜨려야 하므로 수소탄이 터지려면 이 온도에 맞추기 위해 그에 앞서 원자탄이 하나 터진 것으로 보면 된다.

음양의 틀에 갖힌 동양의 환경에서는 절대로 음도 양도 아닌 중성자를 상정할 수가 없다. 대가가 만든 음양의 틀 속에서만 생각해야 하니까 그렇다. 그러니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다.

음양이 대림되는 가장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예로는 물질(matter)에 대립되는 반물질(절대로 anti-matter)이란 게 있고 실험으로 이를 밝혀냈다는 점이다. 동양적 사고를 벗어나는 내가 보가에는 어쩌면 물질과 반물질의 중간형태인 중물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 중물질이란 생각은 내 생각일 뿐  그런 물질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본면 나는 동양적 사고에 닫히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사실  만물 중엔 중간형태로 존재하눈 게 아주 많다. 예컨대 생물과 무생물에는 그 중간인 바이러스가 있고 동물과 식물 사이엔 그 중간인 플라나리아가 있다. 남성과 여성에는 요새 중성(agender)를 인정하는 판결이 미국에서 나왔다고 알고 있다. 중간이 있다면 나(me)와 반나(anti-me)가 있고 그 중간의 중나(영어로 쓴다면, 아마 ame)라는 것도 있을 것이고 이 글을 읽는 당신(you)에게도 반당신(anti-you)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과 반당신의 중간형인 중당신(ayou)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중간의 중나도 만나보고 싶고 당신도 아마 그런 중당신을 만나보고 싶을 것이다.
 
동양의 음양설에는 중간형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음양의 쌍을 발견하였고 그 다음부터는 그걸 의심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게 동양이라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해 그  중간형태를 생각해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대가가 무슨 틀을 형성해 놓으면 그 틀에서 순치되는 (길들여지는) 게 동양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즉, 동양에서는 서양의 학문방법론이 도입되기 전에는 어떤 대가가 한 이론을 확립해 놓으면 그게 맞는지 않는지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하거나 추가 내용을 알아낼 연구를 하지 못하는 비학구적인 묘한 습성에 길들여져 있다. 어쩌다가 그 틀을 의심하여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으로 낙인 찍힌다고나 할까? 조선시대에 공자에 반기를 들면 그는 비참하게  사회적  내지 육체적 처형을 당한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대가의 이론에 의해 주어진 틀안에서 조금의 진전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틀안에 있다 보니 진정한 진전이 아니라 자꾸 미궁속으로 빠져들어 결국엔 말도 안되는 말 장난에 지나지 않는 신비스런 말로 이어진다. 그런 게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이고  이이와 이황의 이기론(이발기발론, 이기호발론 등)이다.
 
요컨대, 동양철학에서는 대가들이 한 말속의 뜻만 쫒고 그것을 과학적 문제로 이끌지 못한다. 요새 인문학이 뜨다보니 노자사상을 특강하는 TV에서 인문학 특강이란 프로그램에서 서강대 한 철학교수의 노자 사상에 대한 강의를 조금 들어본 적이 있다. 그는 노자의 생각이 어떻고 저떻고에 관해서만 주로 말하지만 노자 이론의 한계라든가 그 이론의 현대적 의미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비판을 생각이나 했을까 의심해본다.

그런 게 대물림을 하면서 오늘까지 온 게 동양학문의 한계이다. 서양에서는 철학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와 규명하는 게 많다. 이에 반해 동양학에서는 그런 개념은 그냥 철학이란 개념 속에 갖혀 과학체계에 들어오지 못하고 오히려 과학이 발달하는 데 저해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이론을 이해하려고만 하고 그 이론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였다. 더구나 그 비판에 근거해 그 이론의 진위 내지 허실을 증명할 방법론이 발달하지 못하니까 자료수집이니 검증이나 뭐니  하는 개념이 없다. 그런 검증에 유용한 수학과 통계학은  아예 싹도차 트지 못했다. 그대신 관상믈 보는 사람들이 관상이 통계학이니 하는 이상한 말만 한다. 관상학이 통계적 개념과 관계가 있더라도 그걸 수리적 학문으로 발저시티지 못하여 증명하는 자료나 통계적 개념은 애초에 없었다. 상기한 TV강의자를 포함해 종전에  이루어진 동양학에 관한 TV강의자들은  과거의 대가인  공자, 노자, 맹자, 장자 등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수준의 노력만 하고 그걸 연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창의적 사고를 핮지 못하다보니 진정한 연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처럼 대가의 틀안에 머물고 그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는 것도 한계가 있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결국에는 미신적 요소가 개입되어 비로운 세계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기도 한다. 노장사상이 미신과 결탁하는 경유가 그 한 예이다. 역경이란 주역도 그 예이다. 공자가 주역에 심혈을 기울여 경의 지경에 이르러 역결이라고도 할 징도인데 고학적 극너가 없는데도 누구도 그것에 반기를 들 생각조차 못하고 결국에 점치는 데 운수보는 데 주역이 이용된다. 오늘 날에도 그렇게 사용한다. 또한 동양학은 더러는 종교와 결탁하기도 하여 민간 속 깊이 들어가 버리어 일반 대중들이 이를 믿고 세세손손 답습한다. 예컨대, 불교에서도 한국에 와서는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절에 가면 삼신각인가 칠성각인가 하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는데 그 곳에는 옥황상제가 떡 버티고 있다. 이건 우리 토속신앙이 불교와 결탁한 현상이다. 그래서 불교 이야기에 관한 민간 설화에는 옥황상제가 등장하기도 하고 산신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동양학은 학문이든 뭐든 비과학적으로만 진전되어 오는 병폐가 있다. 대가를 넘지 못하다 보니 그러하다.
 
대가를 넘지 못하는 병적인 이야기를 더 해보자. 그런 병의 예 중 대표적인 것이 공자의 사상이나 학문 방법이다. 우리는 지금도 툭하면 라디오나 TV에 나와서 말할 때 너도 나도 다 공자, 공자, 공자 하는 데, 나는 그들은 공자의 벽을 넘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이는 서양에서는 지금 어느 누구도 소크라테스를 시도 때도 없이 언급하지는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대가의 사상에 갇히지 않는 서양이기에 반론도 제기하고 증명하고 등등의 방법으로 자꾸 발전해 그를 언급할 일이 별로 없다. 반면 동양에서는 공자의 틀 안에 있다보니 그 틀을 벗어나올 획기적인 이론을 개발하지 못한다. 공자와 직접 관련한 것으로 그의 사상의 틀안에 동양이 있는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자. 이 블로그의 동양고전에서 공자에 대해 내가 비판적 글을 썼다. 그내용을 좀 반복해보면, 공자는 인(仁)을 자기 학문의 근본적 개념, 핵심개념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인이 무엇인지, 즉 인의 본질에 대해서는 그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공자는 본질이란 용어 자체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하여 그의 말을 살펴보자. 논어의 학이편(學而篇)의 세번째 글에 그가 하였다는 다음 말이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교모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에는 인이 적으니라.
    (子曰 巧言令色 鮮仁矣(자왈 교언영색은 선인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이 말이 인의 본질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조차 모른다. 그는  이러면 인이 많고 저러면 인이 적다는 식으로 인에 대해 말을 하는데 그건 인의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이 있다면 그것이 드러난 형상에 관한 말일 뿐이다. 즉, 그는 인의 본질에 관하여서는 한 마디 말이 없이 인의 현상인 인간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인의 존재 여부를 파악하려 든다.  말이나 얼굴의 표정은 인격에 내재된 인이 보내는 신호(signal)이긴 하지만 그  신호는 부정확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그런 말이나 표정을 하는 사람은 그런 말이나 표정에 인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의도적으로 거짓 신호를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말은 그럴 듯하게 하며 뒷속을 챙기는 이중 행동을 하고 명사들이 친인을 하는 것도 그런 의도적 사기 거짓행위이다. 사기꾼이 사기 칠 때 좋은 사람 같이 보이지 않으면 사기를 칠 수 없기에 좋은 표정을 짓듯이 말이다. 그래서 현상만을 쫓아가는 것으로 학문을 끝낼 수는 없다. 그런 신호를 관찰하여 그 신호가 보내는 것의 상향을 파악하는 등 현상을 통해 본질을 파고드는 연구를 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공자처럼 신호만 보고 인을 파악하는 방법은  학문을 하는 태도가 아니다. 현상은 본질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도 그게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지 않을 수 있어서 본질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하는 게 학문을 하는 태도이다.
 
본질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서양에서처럼 분석적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나 공자는 그런 노력을 한 흔적이 논어 어디에도 없다. 니이가 대학도 읽어보고 중용도 읽어봤지만 공자의 그런 노력은 거기에도 없다. 전혀 찾을 수 없다. 공자처럼  본질을 캐려 노력하지 않는 학문태도를  나는 대충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런 학문태도를 물러받은 그의 후학들은 그에게 반론을 제기하거나 하는 비판하여 그를 뛰어 넘으려고는 생갇조차 못한다. 오히려 틈만 나면 그를 치켜 세우려고만 한다. 그래서 학문의 내용이나 방식에서 공자가 세운 틀안에서 학문을 한답시고 왈가불가 할 뿐이다. 그런 추켜 세움을 통해 공자는 동양의 위인 중 가장 위대한 위인이 되어 후학들이 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넘어서는 안 되는 앞을 가로막고 선 벽일 뿐이다. 그래서  얼마전까지도 향교라는 곳에 공자를 모시고 그에게 향불을 뿌리고 한 잔 올리는 순서로 그 집안의 양반의 정도를 평가하려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라디오의 고전에 관한 프로그램에 공자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서양에서는 어떤가?  동양학문의 대부인 공자와 대비되는 서양학문의 대부인 소크라테스는 분석적인 학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대화편(그의 학문 계승자인 Platon이 지음)에 의하면 그는 어떤 개념에 대해 그것이 다른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하려 끊임없이 한다. 이런 분석적인인 학문적 접근방법이 발전하여 오늘날처럼 서양학문이 과학과 인문반야에서조차 장족의 발전을 해왔다. 선학의 말을 단지 무조건 르는 게 아니라 그것이 맞는지 증명항려 노력하고 그러다가 반론을 제기하고 그 반론을 증명하는 등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학문체계가 성립되기도 한다. 예컨대, 천동설에 반기를 든 갈릴레오가 있고, 뉴턴의 고전물리학에 반기를 든 아인슈타인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대부인 소크라테스가 벽이 아니라 그를 발판으로 삼아 그의 목마를 타고 다른 세상을 보아 그 세상으로 뛰어내린 사람들이다.  
 
왜  동양의 학문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위에서 말했듯이, 그건 분석적 방법으로 학문읋 하지 못하고 그럴 듯한 대충주의로 학문을 한 공자 탓이라고 본다.  그리고 대가가 나타나면 그 대부를 넘지 못하고 그 틀안에서만 생각할 줄 아는 통양문화 탓이다. 문화의 탓이라고 하는 근거는 이처럼 대가의 틀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학문에서만 아니고 정치, 경제 및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예컨데, 경상도를 비롯한 보수 측에서는 박정희는 넘지 못하고 넘어서는 안 되는 벽이다. 전라도를 비롯한 진보 측에서는 김대중도 그러한 벽이다. 이승만에 대한 국부논란은 앞으로 넘기를 금지시키는 이승만이란 벽세우기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이 불로그의 어떤 글에서 말했듯이, 그는 국부가 될 수 있는  자질이나 업적을 가지지 못한데도 그를 넘지 못하는 틀의 벽으로 만드는 작업이 바로 국부논란이다.  
 
노자도 공자의 우를 범한다. 나의 이 불로그의 어떤 글에서 말해듯이, 노자는 도라는 개념을 이용해 자기 이론을 설파하지만 그도 공자처럼 도가 드러나는 현상을 언급하였으나 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그러다 보니 공자사상처럼 그의 사상도 처세술에 관한 말 잔치로  일관한다. 나아가 그의 신비로운 말에 도취되어 장자에 이르러서는 그 도취가 극에 달해 신비로움의 지경까지 이른다. 그 신비로움은 점을 치기나 운수를 보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그런 노장사상이 다른 종교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종교가 불교이다. 그래서 절에 가면 삼신각이니 칠성각이니 하는 같은 것이 있어서 옥황상제가 떡 버티고 있다. 불교에 노장사상이 침투한 것이다. 이런 일로 해서 점치는 게 번창한 우리나라에서는  점치는 게 일상사이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지식인 특히 정치인은 선거철만 되면 점집이 문정성시를 이룬다. 노장사상에 도취한 현대의 동양철학자들조차 노장사상의 이런 폐단을 깨닫기나 하는가? 이처럼 공자와 노자의 대충주의와 처세술적 태도 및 노자의 신비한 말이 끼어 들어 음양오행설이 점이나 치고 운수나 보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점쟁이의 집 앞에 동양철학관이나 철학관이니 하는 간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니냐고? 다른 곳도 많지만 우선 미아리 고개에 가면 내 말을 맞음을 알게 될 것이다. 
 
2) 오행설의 비판
앞에서 말했듯, 오행설은 우주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요소가 무슨 작용을 하는가에 관한 이론이다. 즉, 우주는 수화목금토의 5요소로 이루어지면 이들이 상생작용과 상승(극)작용을 한여 소멸과 생성이 이루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처럼 우주가 어떤 요소로 생성되는지는 인류가 존재해온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진 관심사이다. 이를 테면, 원시인들은 자기가 믿는 신이 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믿고 그 신을 섬기었다. 그 신이 바위일 수도 있고 나무일수도 있어 이들을 숭배하는 것이 토템사상(totemism)이고, 주위에 있는 위대한 동식물인 호랑이, 소(인도), 곰 등을 숭배하는 것이 애니미즘(animism. 물활사상)이다. 나약한 인간은 위대한 자연 앞에서 자기 주위에서 위대해 보이는 것을 숭배하게 된 것인데 이들이 바로 그런 자연숭배사상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보면 이들 사상은 얼마나 미개하고 유치한 생각인가? 그건 무지의 미개사회에서 존재하는 미신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미신적 사고는 오늘 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종교가 바로 그런 미개하고 무식한 사고의 연장이다. 현대 종교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인간이 자기가 신이라고 한다. 오늘 날 그런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와 불교이면 이들은 그런 사고의 결과물이다. 이게 종교에 대한 내 주장이다.  그 얼마나 황당한가?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부처가 신이고 예수도 신이라 믿으니 말이다. 그들을 믿는 건 호랑이, 곰, 바위 등을 섬기는 미개 사회의 토템이나 애니미즘과 마찬가지이다. 무식하고 미개의 소치이다. 
 
종교는 다 어떤 지역의 미신적 토속신앙이 현대적 종교로 확장된 것일 뿐이다. 기독교는 유태교라는 이스라엘의 토속신앙에서 발달하고 불교는 힌두교라는 인도 토속신앙에서 발달한 것이다. 어떤 좀 쪽똑한 사람이 그 토속신앙을 자기가 신이라는 거짓말로 발전시킨 종교가 기독교이고 불교이고, 예수와 석가가 그 좀 똑똑한 사람인 것이다. 그들은 인간일 뿐이고 신이 될 수 없다. 종교가 미신적 토속신앙이 확장된 것이란 말은 종교가 본질적으로 미신이란 말이다. 그 말은 또한 종교는 모두 미개하거나 혼란의 시대에 생성하지 발달된 사회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종교가 나타날 수 가 없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같은 맥락으로 공자가 살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는 그 당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발달된 사회여서 미신이 종교로까지 나아갈 수 없어 종교가 발생할 수 없었다. 공자가 신이 못되었다는 말이다. 유학이 유교라는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학문으로만 전승해 온 이유는 그렇다. 그러나 미신적 사고는 여전히 민간 사회에 존재하게 된다. 미신에서는 아직도 조자룡이 신이고 재갈량이 신이다. 동네 점쟁이가 그런 경우가 많다. 음양오행설을 말하다가 갑자기 종교이야기를 한 이유는 음양오행설도 그런 미신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역경이라 불리는 미신의 책을 학문이란 이름 하에 아직도 동양이 배우고 있다. 그 역경에서 공자가 많은 것을썼기 때문이다. 대가가 쓴 것이니 무조건적으로 배워야 하는, 아니 한국적 강박관념적 병폐 현상이다. 
 
이제 그런 토템사상이나 애니미즘의 미신시대를 벗어나 과학이 발전하게 된 서양의 역사시대로 들어가보자. 서양에서는 우주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저졌느냐에 관하여 탈레스(Tales)라는 사람이 우주만물은 물(water)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물론 그 전에도 여러가지가 이론이 제기되었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것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최초 이론이 그의 물이론이다. 그가 보기엔 쇠도 녹으면 물이 되기에 이런 관찰을 통하여 그 이론이 생각해냈을 것이다. 무지의 소치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런 무지를 탈피할 비판적 사고와 분석적 사고가 발생하고 그런 기조가 이어나갔다. 탈레스 후 물이 아니라 우주는 이런 것으로 구성되었다든가 저런 것으로 구성되었다 하는 반론적 이론들이 나오고 또 나온다. 예를 들면,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만물이 수(number)로 되었다고 하고 드디어 데모크리토스에 이 세상만물의 구성요손는 원자(atom)라고 한다. 
 
이런 우주 생성 물질에 대한 많은 사고가 중동(middle east)에서는 구리로 금을 만들려는 연금술로 인해 화학이 발전하고 비중의 문제를 발견한 후 eureka, eureka(알았다, 알았다)!라며 발가벗은 체(정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거리를 뛰어 갔다는 아르키메데스라는 과학자가 이집트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의 종교가 이를 더 잇지 못하는 한계를 제공하자. 이들 이론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분석적 방법으로 연구하다 보니 오늘날의 과학수준으로 발전해왔다. 물론 로마시대에 시작한 그 말도 안되는 예수가 신이라는 기독교가 설치니 중세에는 고학의 암흑기를 거쳤다. 그러나 르네쌍스라는 시대를 필두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하여 오늘날 분자도 알아냈고 원자도 알아냈고 전자와 양자 중성자도 알아냈고 유주의 궁극적 기본불질이 쿼크라는 상상까지 나왔고 띠이론(가설)까지 등당했다. 또한 물질과 반물질까지도 상정하고 그 후 실험으로 반물질을 관측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지만, 연금술이라는 것과 합하여 물리와 화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도 하였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론이 나오면 자신이나 후학들이 그걸 증명하료고 실험하고  분석하고 실험하고 추론하고 설명이 안 되면 가설을 세운다. 그래서 자신이나 후학이나 다른 과학자가 이를 탐구하여 긍적적 증거와 반대적 증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하여 오늘날 수준인 과학으로 발전하었다. 그게 소크라테스의 학문 접근법인 분석적 접근법(analytic approach)으로 가능했다. 그리고 그 방법에 다른 방법들(예, 영미의 경험론, 대륙의 관념론 등)을 통해 가능했다. 철학 부분이 과학의 영역에 들어온 게 많다. 반면, 동양에서는 공자 같은 대가를 넘지 못하는 속성 때문에 그런 대가 중의 대가인 공자가 시작한 총체적 접근법(holistic approah)로 인해  음양오행설을 만들고 그게 허위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게 미신에 이용되거나 하는 등 미개를 이어가는 벽으로만 작용해왔다. 좋은 말로 포장해서 총체적 접근법이라 하지만 나는 이를 공자의 학문방식을 대충 학문을 하는 태도인 대충주의적 접근법이라 부로고 싶다. 이는 어떤 것의 본질을 알기 위한 분석이 아니라 드러나 현상 등 대충적인 방법으로 하는 학문양식이다. 앞에서 예를 든 대로, 공자의 학문에는 인(仁)이 본질이지만 인의 본질이 무엇인지 공자는 논어에 한 말이 없다. 다만 이래면 인이 많고 저래면 인이 없나는 인의 드러난 현상만 말했지 본질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이황과 이이도 이(理)와 기(氣)를 말했지만 그 본질은 말하지 못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블로그의 다른 글레 쓰니 수고 스럽지만 거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음양오행설도 처음에 관찰을 통하여 발견된 것을 집약한 것일 것이다. 이 중 음양에 대해 말하면, 모이 세상 모든 게 음양의 쌍으로 된 것으로 보여서 음양설이 나왔을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을 관찰해보면 우리 주변의 것이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 즉 물, 불, 나무, 쇠 및 흙으로 구성된 것 같이 보였을 것이고 , 고학을 모르고 본다면 세상 만물은 대충  그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런 관찰에 근거해 대가(예, 공자, 추연 등)가 아떤 이론을 확립하면 더 이상 한 발짝 못나가는 이론이 되고 동양문화 속에서는 그 틀안에서만 노는 것이 동양학문이다.공자가 주역에 관심을 가진 것이 이런 폐단을 낳는 데 지대닿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후학들은 분석적 방법을 통하여 그 이론을  증명하기는 고사하고 반론을 제기할 생각을 추호도 하지 뭇한다. 그렇게 하는 건 불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치된 학문 태도로는 그 이론의 문제점을 탐구할 줄도 모르고  그대로 수용하여 분석적 방법으로 본질을 연구하지 못하고 확립한 그 틀안에서만 추가적 이론을 말로만 더하다 보니 이런 내용이 늘 그렇듯, 종국에는 신비로운 내용으로 흘러갔다.
 
다시 말해 어떤 이론을 과학적 분석을 통하지 탐구하지 않다보니 그 대안으로 나타난 말잔치로 이어지고 그 지경을 넘어 점이나 치고 운수나 보는 신비로운 내용으로 변질되었다. 이를 테면, 오행의 다섯 가지 요소가 이 세상을 이루는 것이라는 생각이 벽으로 구어진 후 우리 인생도 모두 그 5요소로 구성되고 매일의 날짜도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태어난 날이 물(水)날이고 다른 사람은 태어난 날이 불(火)날이라는 등 말이다. 이런 말 장난에 의하면, 불이 물이 만나면 꺼지듯이, 불형인 사람과 물형인 사람이 서로 만나면  잘못될테니 결혼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상한 공세까지 파고든다. 결혼날자도 어떤 날짜에 하면  좋고 더러는 점쟁이가 반드시 어느 날 해야 한다고 하기고 해 그날 하고 어떤 날짜는 피해야 한다. 그 좋은 날 나쁜 말을 어떻게 아는가? 그 이유는 옛부터 그렇게 해온 것이고 주역에 그런 것이고 등등 말을 듣는다. 과학적 근거 없이 이삿날짜가 정해지고 그 덕에 그날 이사비용을 높게 지불해야 한다. 좋은 게 좋다고 좋은 날 다들 이사하니 말이다. 이처럼 음양호행설이 점이나 치고 사주나 보는 식으로 발전하여 미개한 동양역사가 이어져왔다. 
 

그런 미신적 집대성이 주역이고 공자도 그런데 관여하였다 하여 역경이라 경의 경지에 이르렀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는 공자에서 벗어났는데도 우리나라는 이상하게도 승자독식이 이에 적용되어 아직도 대가를 넘지 못하는 공자사상에 젖어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이승만이 국부여야 한다고 하고 박정희를 비난하면 핏대를 세우는 게 나이든 보수주의자들이기도 하다. 나라가 잘되려면 이승만은 독재자이고 박정희가 산업개발을 했지만, 일본을 따라 대기업 위주의 잘못된 경제모형을 바꿀 생각을 못한다. 이러다 보니 우리 문화의 병폐인 갑질과 승자독식으로 대기업횡포로 기술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고용효과도 아주 높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모형으로 변경하지 못해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는 병쳬적이고 기형적인 경제체제가 되었다. 이를 극복해야만 우리가 산다. 즉, 우리나라는 공자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은 나라이고 어쩌면 그의 잔재가 남은 유일한 나라일지조 모른다. 그를 극복 못하는 데다가 그의 학문적 태도도 남아 있는 지경이라  우리나라에는 미신이 발달하여 점쟁이가 판을 치고 사주보기(명리학)가 판을 치는 나라가 되었다. 총선이 있을 때면 국회의원 본인이나 부인 및 기타가족이 점집과 사주집에 들락날락하여 그런 집앞은 사람이 줄을 서는 것은잘 알려진 현상이다. 이 세상이 수화금목토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세상의 발생소멸 및 변화된다는 것을 음양오행설로 설명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어서 공자를 버리고 박정희를 버리고 하여야 올바른 경제 모형이 보이고 민간에게는 점쟁이가 별로 없고 사주쟁이가 별로 없어 쓸데 없는 낭비도 줄이는 등 민간사회도 건전하게 될 것이다.
 
 
(3) 점치기, 풍수지리설,  작명학, 명리학, 관상학 등애 대한 비판
 
점치기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김일성이 죽음을 예고하였다 하여 신통으로 소문난 점쟁이 집이 있었다는 까십형 보도(gossip-type media reports)가 있음을 기억 한다. 그 때문에 그의 집 앞은 점치러 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보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김정일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하여 그 집의 성시는 멈추었다는 보도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점쟁이가 하나만 맞추면 그 점쟁이가 용하다고 입소문이 나서 그 집은 대박을 맞는다. 점쟁이는 자기 점집에 찾아가는 고객에게 사용하는 수법은 다음과 같다.
 
   점(쟁이): 당신 집에 과거 누가 심한 병에 걸렸네,
   바(보): 그런 사람 없는데요.
   점: 잘생각해봐. 사돈 집들을 ㅍ포함해서.
   바: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돈집에 그런 사람이 있으니) 그런 우리 딸 시할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하긴 해요.
   점: 그렇다니까.
   바: 네에.
   점: 지금 액땜을 하지 않으면 그 액운이 당신 집에 올 기미가 있어.
   바: 네에? 그럼 어떻게 하죠?
 
이러면 딱 걸려든 것이다. 궂값이 1,000만원일 수도 있고 억대일 수도 있다.
 
내가 어릴 때, '너는 40이 되면  위대한 사람이 될 거다."라고 자주 말한 점쟁이 할머니가 동네에 사셨다. 내가 공부를 좀 하다보니 그렇게 되리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구나 40이 되면 잘 되든지 아니면 못되든지 둘 중 하나로 된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맞을 확률이 50%였다. 더구나 공부를 잘하면 잘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40이 되면 대통령이 되어 있든가 아니면 그 무슨 위대한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나는 어려서 물어볼 생각조차 못했다. 공자의 틀로 물든 나라에서 교육받은 어린이였던지라 그런 질문 자체를 해볼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내가 서양에서 자랐으면  그런 상황에 반드시 그녀에게 그런 점에 대해 물어봤을 것이지만 말이다.
 
나의 경우처럼 점쟁이는 늘 애매하게 말하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거나 그 말의 적용법위를 넗혀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둔다. 어떤 야당 정치인이 이번 총선에서 호남이 자기를 지지하지 않으면 정계를 은퇴를 하겠다든가 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총선이 끝나자마자 호남에서 참패하다시피 한 후에 그는 그게 자기를 거부하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겸허한 자세로 기다려보겠다라는 식으로 말장난을 하고 빠간 것으로 알고 있다. 나라 경영에 말장난으로 하다니....한심하다. 국가 통치자인 어떤 여자 대통령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을 국회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진실한 사람임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누구도 그걸 모른다. 그렇지만 대체로 일반인의 생각은 그녀에게 충성을 바치는 게 그 판단기준이라 말한 것으로 들었ㅇㄹ 수도 있다. 이 또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점쟁이의 용함에 대한 말을 몇 마디 더 하고 싶다. 점쟁이가 어느 하나를 맞추면 그게 용하다는 말은 비과학적이다. 만약 100번의 점을 쳐 95번을 맞추면 그가 용하다는 게 통계적으로 용할 가능성이 높아 용하다는 말은과학적이라 볼 수 있다. 하다 못해 90번 아니더라도 크게 양보해 85번만 맞추었다 하자. 그런 점쟁이를 용하다고 하는 게 현대 통계학적 관점에서는 과학적으로 위험한 결론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에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용하다는 점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줄 것이다. 그렇게 하기도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양보라 해도 100번 점 중 60번에서 70번을 맞춘다면 그가 용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점쟁이나 역술인이 아닌 일반인이라도 그 정도는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점쟁이처럼 애매하게 말하여 점을 치러온 사람이 스스로 점칠 내용을 간접적으로 실토하게 하면  점괘가 맞을 확률은 90%까지도 될 수 있다. 역술인이 유능하게 보이려면 그런 간접적인 토로을 이용할줄 아는 두뇌는 가져야 한다. 그래서 요역술인이나 점쟁이들은 비교적 똑똑한 편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혹세무민할 만하리라 본다. 이는 똑똑한 누구나 점쟁이 기법만 잘 터득하면 용한 점쟁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새 내가 즐겨보는 채널  A의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시다) 프로그램에 작명가, 풍수지리설 및 관상학을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온다. 안 그랬으면 한다. 그들 이론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증명 안  된 것이 그뿐만이 아니겠지만 이들은 다른 것과 달리 혹세무민할 가능성이 높다.얼마 전에는 체널 A가 역술인, 점쟁이 작명가 등을 대상으로 누구 예축이 더 신빙성이 있느냐 하는 것을 조사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것으로 기억한다. 점쟁이 두 명이 가장 잘 맞추었다고 보아 신통령이 있지 않을까 개연성의 결론을 내린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결론에 문제가 많다. 한두 명의 점쟁이 말이 그것도 애매하게 맞았다고 하는 것 가지고 점쟁이가 맞추었다는 결론을 방영한다면 그건 위험한 발상의 프로그램이다. 혹세무민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그런 조사를 하려면, 실험대상이 수십명 내지 수백명의  표본크기를 가지고 용함을 추정해 통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맞추어야 한다. 즉, 95%이상 맞추는 점쟁이도 많고 각 점쟁이가 맞춘 경우 수가 100명 이상에서 그러했음을 보여야 한다. 즉, 점쟁이 표본이 크고 또한 점쟁이의 맞추는 실험대상자수도 아주 많아고 그 맞춤이 99%이면 아주 좋고 하다 못해 95%이어야 한다. 그래야 95% 신뢰수준인지 99%의 신뢰수준인지를 언급하며 결론을 내리어야 했다. 단순히 두어명 점쟁이만 가지고 그것도 실험대상이 몇 먕뿐이고 맞춘 비율이 1/2을 넘어서는 정도로는 그들이 용하다고 할 수 없다. 통계적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비과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프로그램을 보는 건 신비한 신통력이라 감탄하고 그래서 그 프로그램에 설탕맛을 느낄지 모르는 혹세무민성 프로그램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쟁이가 그걸 선전하면 그 집 앞은 문전성시를 이룬다면 그 방송국이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그 방송결과 시청자의 정신건강을 헤칠 수도 있 않나 생각한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을까? 내 생각엔 과학이나 통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을 입안하고 실행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이처럼 관상학, 작명학 및 풍수지리설, 역술인(명리학) 등이 음양오행설의 비판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관상학에 대해 말하면, 인상이 좋으면 취업이나 사업 등에 유리한 수준까지는 맞다. 얼굴에 성격 등이 어느 정도 나타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얼굴에 이 부분이 이러면 재물운이 있다든가 저 부분이 저러면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다든가 하는 것은 웃기는 수준의 이야기이다. 도대채 누가 우리 얼굴이 이런 부분이 이러면 부부애가 없거나 있고 저런 부분이  저러면 재물운이 있고 없다고 했는가? 어디 과학적 근거가 있는가? 그들은 그게 통계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통계를 본 일도 없고 그런 통계가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점쟁이가 신을 끌어 들이고 사주쟁이가 철학이란 말을 끌어들이 듯이, 인상학은 통계학을 끌어들인다. 속된 말로 모두 뻥이라고 본다.   
 
작명학도 허황된 것이란 점에서는 관상학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작명학을 말하면, 글자에 뜻이 있는 한자를  사용하거나 사용했던 동양 문화권에만 있고 서양에는 작명학이 없다. 동양인들은 이름 때문에 잘되거나 잘못되는데. 서양인에게는 그런 게 없는 것은 어찌 설명하는가? 이런 ㅈ닥명학은 항문이 뜻글자이고 이에 음양오행설의 의미를 붙여 생긴 게 작명학일 뿐이다. 이름이란 부르기 쉽고 아름다우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이름은 사람들을 서로 구분하기 위한 기호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건 연필, 저기 필통, 이건 돌, 저건 강아지 하며 물건 사이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 이들 물건의 이름이듯, 내 아이와 이웃아이를 구분하기 위한 기호가 사람 이름인 것이다. 형과 동생을 구분하기 위한 기호도 이름이란 말이다. 이름이 추하지 않고 혐오적이지 않으면 듣기에 거북하지 않을 것이고 뜻이나 발음이 듣기에 좋으면 좋은 이름인 것이다. 요새 젊은이들의 이름에는 한자로 쓰지 않고 순수한 우리말 쓰는 것을 보면 작명학의 무용론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할 것이다. 
 
작명학을 말하면, 인상이 좋으면 잘 될 가능성이 있다. 같은 값이면 인상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싶고 종업원으로 채용하고 싶다. 그러나 얼굴 여기는 재물운이 있고 저기는 부부애가 있다는 건 황당하다, 그 부분이 글하다는 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관상쟁이들이 흔히 그건 통계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어디 Big Data(대량데이터)가 았는가? 없다. 주역을 철학이라 하고 사주보는 사람을 철학자라 하여 신비화시키는 데 정통학문을 사용하듯 토게학도 그런 식으로 쓰인 것일 뿐이다. 그런 통계자료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풍수지리설에 대한 비판을 해보자. 풍수에는 양택론과 음택론이 있다. 양택이란 우리가 사는 집에 대한 터잡기이론이다. 양택론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산이 많고 가파른 지역은 말도 빠른 편이고 성질도 그친 편이다. 평가야 많은 지역은 그 반대의 성격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산이 많은 경상도 사람은 전라도 사람보다 거칠고 말이 빠르다. 그게 추진력으로 작용하여 신라가 백제를 이겼다. 고구려가 더 산악지방이 많지만 신라에 망한 것은 지정학적 이유에서이다. 즉, 대국인 당나라 때문에 신라에게 일부가 먹히고 나머지가 당에게 망한 것이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이수년내에 남한 경제를 죄자우지 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라 억척같이 일도 하고 산악지대를 살아온 추진력으로 인해 그렇게 될 것이다. 또한 남한이든 북한이든 물이 앞에 있고 산이 뒤에 있는 집터에서도 정서적으로 좋은 장소라 양택이론이 어느 정도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 앞에 문필봉이 있어 이 지역은 학자가 많이 난다는 식으로 하는 것은 웃기는 수준의 말이다. 그 지역에 대학자가 나면 자연히 그 지역에 그를 닳으려는 kids가 많아 그런 학자가 많이 난다. 교수집안의 아이가 교수가 될 확률이 높고 장사집안의 아이가 장사를 잘하는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 높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필봉이 도데체 무슨 신통력이 있어 학자를 배출시키는가? 그들의 이론이 맞다면 문필봉이 어떤 작용을 하여 그렇게 되는지의 인과관계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양택론이 위와 같다 하더라도 음택론이 맞을 리는 없다. 도대체 명당이란 곳에 쓰면 그 땅이 무슨 인과관계로 자손을 잘 되게 하는지에 관한 이론을 제공하지 못하는 게 풍수지리설이다. 대충주의의 한 예이다. 그들이 쭉해야 하는 이야기가 그 명당이 후손에 기를 준다든가 하는데 기란 도대체 뭣인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각각 이(理)와 기(氣)에 관한 이론을 폈지만 도대체 이가 무엇이며 기가 무엇인가? 이는 근본이고 기는 드러난 현상이라 해석할 수 있지만 이와 기가 도대체 뭔가?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이다.공자가 인을 말하지만 인이 뭔자를 면확히 말하지 않는 대충적 학문 접근법이 이황이 이익의 머리 속에 박혀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이오ㅘ 기각 현대 과학적 용어와 개념으로 무엇에 해당하는가를 이황과 이이가  말해야 흐는데 그런 게 없다. 그냥 신비롭게 느껴지는 뜬구름 같은 허황된 개념이고 개념 정립 없이 펼치는 그들의 이론은 사상누각적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사주팔자를 보는 명리학(역술)도 위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하고 추가 비판은 생략한다.
 
다시 음양오행설로 돌아가면, 음양오행설에 대한 나의 비판내용을 요약해보자. 최초 생각과 관찰을 좀 하던 자가가 무지로 이 세상이 음양의 쌍으로만 되었고 이 셋의 구성요소는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을 세운게 음양오행설이다. 그 후학들은 그 대가가 이룬 이론을 넘지 못하는 그 틀안에서 그 이론을 잘전시킨다. 즉, 반론을 제기한 후 이를 검증하는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전 내지 반전시키는 게 아니라 그 틀안에서 그 이론에 신비를 가하여 우리 일상생활에까지 이를 활용하게 된 것이 오늘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음양오행설이다. 이것이 노장사상과 작용하여 혹세무민의 점치는 수준으로 흘러왔다. 그것이 서양에서처럼 과학으로 발전했으면 서양보다 더 빨리 과학이 발전하였을 것이다. 미개시대에 관찰을 통하여 세상만물이 음양과 수화목금토로 이루어지고 상호 순작용 내지 상호 역작용을 하는 것처럼 잘못 생각되었던 것이 오는날에도 그런 듯 그  틀에서 한 발자국도벗이나지 못하는 우리 동양이고, 특히 한국이다. 사이비 종교가 극성스럽고 점쟁이, 작명가, 역술인, 사주팔자(소위 명리학자)이거나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몽매한 사람 수가 인구 대비로 OECD라는 문명국가 중 우리가 세계 최대이리라.  이는 우리나라가 오지국가 제외하면 우일한 문명적 아직도 미개사회임을 의미한다.
 
 
 
(나중에 더 쓰고 고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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