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한국문화의 특성: 들어가며
이 글을 쓰는 변: 한국문화의 특성에 관하여 시리즈의 글을 쓰고자 한다. 여기서는 그 첫째(I)의 글로서 이 시리즈의 도입부이다. (이 시리즈의 글은 주제를 위해 시간과 공간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것들이 하나의 가상 공간 및(또는) 시간으로 융합될 수도 있다. 이하 동일)
I. 한국문화의 특성: 들어가며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잔인한 달’인 쌀쌀한 4월, 맹골수도의 소용돌이가 세월호를 삼켜버리고 그 소용돌이가 한국 전체를 삼길 것 같은 2015년 어느 여름 오후 4시쯤인가 보다. 내 연구실문에 뜻하지 않게 노크소리가 들렸다. 방학이라 누가 올 것 같지 않은데, 누구일까? 나는 읽던 문화심리학 원서에서 눈을 때고 연구실 방문을 향해 “네!”라고 대답했다. 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캐주얼을 입은 30대초중반으로 보이는 키가 큰 여인이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후 내게 말을 건냈다.
지원: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교수: 네, 그런데 누구신지?
지원: 저는 교수님을 잘 알고 있지만, 직접 뵙기는 오늘이 처음이어요.
처음 직접 봤는데도 나를 잘 안다? 다소 의아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의자를 권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앉으니 그녀도 그 의자에 앉아서 긴 호흡을 하더니 자기소개를 했다.
지원: 저는 지원이라고 해요. 오래 전이었어요, 저는 교수님께서 지도교수를 하시던 이 대학교 영자신문의 수습기자모집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
교수: 그랬던 일이 있었군요. 떨어졌다니 미안해요.
지원: 아니에요. 제가 자격이 안 되었나 봐요. 그 앞 연도에 입학하여, 입학 후 즉시 휴학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었어요. 돌아와 수습기자에 지원했는데, 다른 지원자들보다 입학연도가 1년 빨라서 최종 면접에서 불합격되었어요.
아하, 그 여학생이 이 여인이구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나는 미국에 유학을 하고 그 나라에서 대학교수로 있다가 한국의 이 대학으로 온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총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 갔더니 영자신문 지도교수를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사실 이 대학의 교수가 되는 데도 심한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총장의 측근도 아니면서 그것도 신참으로 대학본부의 보직을 맞는다는 건 당시 정서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나는 영문학 관련 전공자가 아니므로 있을 수 있는 뒷말이 싫었다. 정중히 사양했더니 자기가 보직제의를 하면 아무도 거절하지 않던데 의외라 했다. 그리곤 영자신문 학생들이 원하니 학교와 학생들에 대한 봉사라 생각하고 맡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학생들에 대한 서비스라는 말과 자꾸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 그 직을 수락하였다.
영자신문 학생들과 상견례를 한 며칠 후 편집실에 들렀다. 그때가 마침 봄 학기 초라 수습기자 모집이 있었고 간부기자 몇 명이 둘러앉아 지원서를 심사하고 있었다. 한 여학생의 지원서에 쓰인 ‘어학연수’가 내 눈길을 끌었다. 그때만 해도 어학연수가 흔하지 않았다. 영자신문 지도교수의 역할은 영어문장 교정에 국한되고, 모든 학생활동은 학생들 자율사항이었다. 그래서 수습기자 모집과 같은 것에는 전혀 간여할 수 없었다. 편집장의 양해 하에 그 여학생의 지원서를 읽었다. 자기소개서에 의하면, 영어에 흥미가 커 고등학교 때 영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입학하자 곧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래서 영어회화와 영작문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도 했다. 좋은 신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열정에 대해서도 잊지 않은 자기소게서였다. 다른 지원서도 모두 읽어봤지만 그 여학생이 가장 좋은 지원동기와 영어실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그 여학생이 당연히 합격하리라 예측했다. 그러나 내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며칠 후 편집실에 다시 들렀을 때, 편집장(편)이 혼자 있기에 그 여학생에 대해 물어봤다.
나: 수습기자 뽑느라고 수고 많았다. 잘들 뽑았겠지?
편: 네. 수습기간을 마치고 모두 열심히들 해요.
나: 그렇구나. 근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
편: 네, 말씀하세요.
나: 어학연수를 다녀온 그 연수갔다던 여학생은 왜 불합격 되었던데.
편: 네? 아, 그 여학생요? 그렇게 되었어요,
나: 면접을 잘못했나? 어학연수를 할 정도면 실력도 대단하고 열정도 대단해 지원동기도 아주 좋던데….
편: 면접은 잘 했어요. 입학연도가 안 맞아서 그래요.
나: 입학연도?
편: 네. 서로 불편해서요.
나: 불편? 무슨 불편 말이니?
편: 그 여학생은 신입생이 아니어요. 작년에 입학했는데,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했어요. 올해 입학한 다른 수습기자와는 1년 선배지요. 그런데 신문기자의 기수문제로 신문사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요. 전에 없던 일이라서요.
나: 기수문제? 그게 왜 문제이니?
편: 신문사에서는요. 모든 기자가 신문사에 들어온 연도에 따라 기수를 가져요.
나: 그건 나도 알아. 모집광고에도 몇 기를 모집한다 했더구나.
편: 네. 그게 같으면 서로 말을 놓아요. 입학연도로는 선후배간이라도 신문사에서는 기수로 서로 말을 놓느냐 않느냐를 결정해요.
나: 그래? 그러니까 입학이 빨라도 기수가 다르면 말높이가 다르다. 그래서 불편하다?
편: 네.
나: 그럼, 그걸 수용하겠느냐고 그 여학생에게 물어보지 그랬어.
편: 면접 때 물었는데 수용한다 했어요.
나: 그런데도 불합격시켰다?
편: 네. 아무래도 말을 놓게 될 후배들도 불편할 거예요. 입학동기가 같은 사람끼리 한쪽은 존댓말을 하고 다른 쪽은 반말을 하면 그것도 서로 불편할 거예요.
나: 그렇구나. 불편해도. 좋은 신문 만드는데 기여할 텐데.
편: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업무지시 때 서로 불편할 뿐 아니라, 신문사의 위계질서가 엉컬어질 수도 있어요. 간부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불합격시키기로 결정했어요.
그 사건은 내게 커다란 문화충격이었다. 나도 기업에 잠깐 근무했는데, 유학가기 전 입사동기니 뭐니 하면서 많이 어울렸지만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언어문제가 이 정도로 부작용을 일으킬 줄 몰랐다. 허기야 잠깐 근무하다 유학을 가 미국에서 너무 오래 살아 능력을 우선지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탓이었으리라. 누가 어느 자리에 임명되면, 사법연수원, 육사, 경찰대학 등의 기수가 중앙일간지에 표시되고 그게 그의 직장에서 인사상 상당히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를 테면, 검사 중 한사람이 검찰총장이 되면 동기와 선배기수는 줄줄이 사표를 내는 게 관례다. 그렇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어른 사이의 문제려니 했던 게 내 생각이었다. 또한 그것은 권력집단과 같은 특수집단의 병폐일 뿐이란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이런 연공서열의 병폐는 학생들에서조차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남북간 이념 대립, 남한 내 동서 간 지역대립이 있고, 세대 간 대립 등으로 보기에 흉한 얼룩덜룩한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게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아뿔싸, 학생 세대 내에서도 기수문제로 갈가리 찢겨져 있구나!. 앞 세대보다는 우리 세대에서 더 심하였듯, 우리 세대에 비해 미래세대에 이런 병폐가 더 악화된 것 같다. 나쁜 것은 더 나빠지는 게 속성인 것 같다. 그 문화충격은 그 후 내내 내 뇌리 속에 박혀있었다. 그 당시의 기억을 더듬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원: 그 후 저는 영자신문에 실린 글을 자주 읽었어요. 그 당시 영문과 선배들에 의하면, 교수님께서 지도교수가 되고나서 영자신문의 문장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했어요. 전공이 달라 교수님의 과목을 수강하지는 못했지만, 교수님이 교내에서 하신 특강을 몇 번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조금 전 들어올 때 금방 교수님을 알아봤어요.
교수: 과찬을 하는군요.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여기를?
지원: 제 얘기를 더 말씀드릴 게요. 글쓰기가 좋아서 중앙일간지의 기자가 되려했지만 되지 못했어요. 그래도 글 쓰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대기업을 마다하고 월간잡지사에서 기자를 하고 있어요.
교수: 축하해요. 보람 있는 일이네요.
지원: 교수님, 저를 제자라 생각하시고 말씀을 낮추세요.
교수: 글쎄. 지금은 성인인데….
지원: 교수님은 제가 존경하는 분이세요. 그렇게 하시는 게 제가 편해요. 그냥 지원이라고 불러주세요.
교수: 알았네. 아주 낮추기는 내가 그렇고 반만 낮추면 어때?
지원: 제게는 아주 낮추는 게 편하지만, 교수님께 편하신 대로 하세요.
교수: 그래, 때로는 반말, 때로는 ‘하게’ 수준으로 함세.
지원: 네, 교수님.
교수: 이제 존댓말에 대해 타협이 되었네. 우리말에 존댓말이란 게 있어 참으로 불편해,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서양어나 중국어처럼 존댓말이 없다면 이런 타협시간이 필요없었을 텐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어 때문에 이런 불필요한 에너지의 소모가 많이 필요하지. 우리 말은 존댓말/반말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우리나라 발전을 아주 많이 저해하지.
지원: 네. 우리나라 말이 그렇게나요?
교수: 그렇다내. 지원이 그때 영자신문기자가 못된 아픈 경험도 이 존댓말/반말 때문이었잖아. 그것 땜에 지원의 인생이 많이 바뀌기도 하고요.
지원: 그랬던 것 같아요.
교수: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못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언어 때문이라고 봐.
지원 노밸상을 못 타는 이유가요?
교수: 그렇다네 그건 차차 이야기 하기로 하지.
지원: 사실 저는 교수님께 그런 말씀 듣고 싶어 왔어요. 참 잘 온 것 같아요. 저는 잡지사에서 사회분야를 담당하는 기자일을 해요. 육아휴직으로 당분간 친정에 와 있어요. 더운 여름이지만 오늘은 구름이 많이 끼어 조금 시원해서 학창시절을 생각하며 교정을 거닐고 있었어요. 아직도 옛날 그 자리에 있는 영자신문 간판을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 지원했던 그 일과 교수님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혹시나 하면서 여기로 와봤어요. 역시나 연구실에 계시군요. 문을 노크할 때 저는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안에서 응답이 나오자 무척 기뻤어요.
교수: 이렇게 만나니 나도 참 기쁘네.
지원: 혹시 교수님이 계시면 세월호 사건에 관해 여쭤봐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왔어요.
교수: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라면 신문이나 방송에 많이들 원인분석을 하고 해설도 하곤 그러던데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지원: 저는 관점을 달리해서 여쭙고 싶어요. 이 사건은 한 마디로 비리 그런 거의 축소판 같아요. 그 사고 당시의 상황이나 처리문제와 같은 현실적 문제보다는 이 사건을 일으킨 근본적 문제를 파헤쳐보고 싶어요. 이를테면, 선장의 실수니 불법 선박개조니 하는 것보다는 그런 걸 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며, 재발방지에 지혜를 모아도 부족할 텐데 여당 대 야당, 정부 대 유족, 보수 대 진보로 싸움만 하는 심리현상을 알고 싶어요. 함께 힘 모아 유족을 위로 하고 사건의 원만한 수습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싸움이나 하잖아요? 교수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다른 분석을 하실 것 같아요. 그걸 듣고 싶어요.
교수: 왜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나?
지원: 전에 대학신문에서 북한은 잘 살아도 문제고 못살아도 문제라고 쓰신 글을 읽었어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그 다음에는 자유가 생각나 요구할 것이겠고, 못살면 못살아 굶주린 탓에 민심이 흉흉해 문제일 거라는 글 말예요. 북한의 종국적 운명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 글이었어요, 그 글 말고도 지역감정에 관한 교수님의 글을 봤어요. 그건 장기독재의 산물이고 그 치유에 대한 시대적 소명을 수행하라고 뽑은 대통령은 그 소명을 저버리고 남북문제에만 매달리고 오히려 지역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글 말예요.
교수: 한두 개의 글을 읽고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말게. 그건 일반화의 오류(generalization fallacies)를 발생시킬 수 있다네.
지원: 일반화의 오류요?
교수: 몇 가지를 사례를 보고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오류란 말이네. 내 글 한두 개로 내 능력을 판단하면 그런 오류를 범할 수 있지.
지원: 그렇군요. 제 생각이 오류일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저는 제 판단이 틀리다고 보지 않아요.
교수: 알았네. 그럼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지.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이 모든 사례에 다 맞을 수는 없지. 일반적으로 말한 것이 구체적으로 가면 맞지 않는 오류에 해당하는 구체화의 오류(specification fallacy)를 범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게.
지원: 네. 그런 오류를 구체화의 오류라 하는군요. 벌써부터 정말 좋은 개념을 많이 배우고 있어요,
교수: 그렇다네. 이제 시작하겠는데, 먼저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문제의 근본원인을 분석하고 그 치유처방을 해보아야 하는데, 그걸 다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려.
지원: 저 육아휴직기간이 상당히 남아 있어요.
교수: 그럼 되었네. 벌써 5시 반이야. 식사를 하고 문화에 대한 정의를 내린 후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갈 생각이네.
지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