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대통령에 관한 소고

III.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소고

매미가 웃는 까닭 2016. 2. 27. 22:43



III.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소고


박정희는 길고 긴 장기집권을 하였다. 일은 많이 했지만 장기집권이란 게 늘 그렇듯 독재로 이어지다가 말년에는 국민을 우롱하는 극악한 수준의 공포정치인 유신이란 걸 했다. 여기서는 박정희의 공과를 제3의 입장에서 간략히 평가하고자 한다. 아래에 설명하는 내용을 읽고 보수주의자, 특히 경상도 기반 지역주의자들은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서 이런 글을 쓴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래서 밝히는데 나의 고향은 경상도이다. 그렇다고 친노, 친문 등의 지역기반 계파에 얽히는 사람이라서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나는 지역기반에서이든 어떤 다른 목적 내지 이유에서이든 계파라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다. 계파는 후진국, 특히 동양,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강한 망국적인 병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에서 내가 김대중에 대한 평가를 읽을 수 있는데 ,거기에서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 자세와 비판수준으로 글을 쓸 것이다. 어디까지나 중립적 관점에서 그리고 날카로운 필체로 글을 쓴다는 말이다.


 


(1) 4.19와 5.16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호수 등 자연의 자정 이야기로 이들 두 사건에 대한 평가 글을 시작해보자. 자정(自靜)이란 스스로 전화라는 말로서 혼탁해진 그 어떤 것이 스스로 깨끗해져 원래상태로 돌아가는 복원현상을 말한다. 이런 자정현상은 자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연호수의 자정이다. 자연호수는 오염으로 혼탁되어도 그런 혼탁이 더 이상 호수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생하지 않을 때 일정기간을 지나면 스스로 깨끗해진다. 미국, 일본 등에는 자연호수가 많은데 그런 나라의 자연호수들은 모두 자정능력을 가진다. 


우리나라에는두 개의 자연호수만 있는데, 이들은 백록담과 천지이다. 이들 둘 외에는 우리나라에는 자연호수가 없다. 6.25 전투에서 미군이 참패했던 개마고대 근방의  장진호, 춘천의  소양호 등  모두 인공댐으로 물길을 막은 인공호수이다. 그래서 이들엔 자정능력이 없다. 이들은 한 번 오염되면 쉽사리 정화되지 않는다. 지금 4대강 사업으로 인한 녹조현상도 자정력이 없어 발생하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4대강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보로 가둔 물은 인공호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흐르는 강물이라도 인공적으로 모아 두면 자정능력 부족으로 녹조현상이 일어나는데, 다른 인공호수는 더욱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준설사업 등으로 청소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해도 자정능력이 없어 다시 쉽게 오염된다. 


자정문제가 발생하는 건 인간사회에도 예외는 아니다. 예컨대, 황**로 인한 줄기세포에 관한 연구결과의 조작사태라는 혼탁한 현상으로 우리나라의 관련 학계 내지 다른 학계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그 당시 MBC 방송, BRIC 등의 자정노력으로 상당히 회복되어 그런 사건이 없었던 것보다는 못했지만, 혼탁해진 학계의 신뢰성이 어느 정도 회복된 듯하다. 그때 이들 두 조직의 자정노력을 격려하지는 못할 망정, 우리는 MBC를 얼마나 비난했던가!  내가 우연히 본 네티즌들의 댓글 중에는 줄기세포의 연구에 대해 우리를 견제하려는 미국과 이들 MBC 등이 짜고 황**을  죽이려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비난도 있었다. 이들 비난처럼 MBC 등이 영원히 비난 대상으로 되었다면 우리의 관련 학계는 물론 다른 학문 분야도 세계에서 설 땅이 없는 학문적 미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세계적 학자가 거의 없는 현상에서 그런 자정 노력은 우리 학계가 살아남기 위해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줄기세포 사건에서 보듯,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자정노력이 중요하다.


사회개혁에는 점진적인 것이 좋지만 그런 식으로 하는 개혁이 불가할 때 급진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그 방법이란 혁명을 말하는데, 이에도 자정 이론이 적용된다. 혁명이 일어나면 나라 질서를 포함해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혼탁할 만큼 혼탁해진다. 영국이 그랬고 프랑스가 그랬다. 영국은 마그나카르타를 시발로, 수세기 동안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노력을 해왔고 그게 잘 안되니까 급진적인 방법인 두 형명, 즉  청교도혁명와 명예혁명에 호소하였다. 프랑스도 그러해 프랑스 대혁명이란 것을 거치었다. 다행인 것은 사회에는 이런 혁명의 혼탁에 대한 자정능력이 있다. 그렇지만 혁명으로 인한 혼탁은 너무나 커서  그게 정회되어 원래상태로 돌아가는 데에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길고 긴 정화의 시간이 지난 다음 영국과 프랑스에는 지금 민주주의의 씨가 자라 꽃으로에 만발하다. 이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혼탁은 반드시 자정능력에 의해 수습되어야만  건전한 나라로 된다. 


혁명과 유사하지만 전혀 성격이 다른 급진적 개혁방법이 있는데 그건 군대에 의한 쿠데타이다. 군대가 개입하면 일시적으로는 아주 효과적이지만 그 후유증은 대단해서 다시 혼탁해진다. 왜냐하면 군대개입으로 인한 개혁은 자연정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군인이 정권을 잡고 수습하면 단기효과가 있어 이를 보고 국민은 착시현상으로 군인의 정권에 호응할 것이지만, 권력 맛을 알아버린 군인이 정권을 내놓지 않으려 하게 마련이다. 나아가 권력을 내려 놓으면 그들의 안위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장기집권에 이르고 그게 지속되면 국민저항으로 악랄한 독재가 된다. 이에 딱 들어 맞는게 5.16쿠데타이다.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 혁명의 주동자들이 설치며 온갖 구호를 부르짖어 나라가 아주 혼탁했음은 당연했다. 전쟁까지 겪은 북한과 협상이나 뭐니 한 것까지 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땠든 이런 혼란을 틈타서 권력욕이 강한 일부 군대가 일으킨 게 5.16쿠데타이다. 모든 쿠데타에는 요란한 공약과 감언이설 같은 게 있게 마련이다. 5.16에도 그런 게 있는데 반공을 국시로 하고 토탄에 빠진 민생을 해결한다는 공약이 그들이 내세운 쿠데타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쿠데타주동들은 쿠데타를 혁명이라 부르지만 그건 아주 나쁜 후유증을 치르게 하는 쿠데타일 뿐이다. 그 후유증의 치유기간은 고통스럽고 길다.


어떤 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은 늘 설치게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라를 세우는 공을 세운 개국공신들은 더욱 그러했다. 예컨대, 역성혁명(사실상 쿠데타)로 일으킨 이씨조선(이 용어는 일본이 조선을 낮춘 말지만, 나라를 일본에 넘긴 조선을 낮추고 싶어 나는 이 말을 씀) 의 개국공신들도 그러했다. 그 건국 초기에는 태종 이방원이 공신이라 마구 설쳐대는 정도전 등의 공신들을 모두 죽였다. 중국의 유방이 통일하여 한이란 나라를 세웠는데, 그 공신 중 한신이란 장군은 결국 자기가 제거될 대상일 수 잇다고 보아 도망을 갓다 한다. 이승만 독재를 타도한 4.19혁명에도 공신이 있는데, 그 주동자들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마구 설쳐대는 바람에 김종필과 박정희 등의 정치군인들이 이를 빌미로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앞에서 기술한 바 있다. 국군 창설과 6.25에 공을 세운 4명(맥아더원수, 리지웨이 대장, 백선엽, 김동석) 중 하나로서 백선엽이란 사람이 있다. 그런 공덕으로 그는 우리나라 최초 4성장군이었는, 최근에 쓴 징비록(유성룡의 임진왜란 시에 쓴 징비록이 아님)이란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5.16은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그는 그 책에서 쓴 것을 보면, '박정희의 배려'로 캐나다 대사도 하고 교통부장관도 하여서 5.16에 명분이 있다는 말로 평가를 내렸다고 보며,  5.16쿠데타에는 나름대로 명분 있었다는 그의 글은 자기 변명적이라고 보면 된다. 어떤 쿠데타에든 명분이 없음을 그가 모를 리 없다. 나 같으면, 자신보다 한참 아래 계급자가 일으킨 쿠데타 세력에 힘을 보태는 모양세를 가진 그런 직책을 맡지 않고 고고히 살았을 것이다. 김홍일 장군처럼 야당에서 박정희를 비판하는 수준은 아니어도 말이다. 어쨌건 5.16을 일으킨  정치군인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에서도 4.19혁명 후 혼란의 정화에 시간이 좀 거리기는 했겠지만,  종국에는 잘 정화되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영국과 프랑스처럼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려 지금쯤은 민주주의의 꽃이 만발해 무궁화를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란 게 내 주장이다.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자정에 의해 혼탁한 나라가 수습된 예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군사정권 하에서 하던 대로 대학생들이 신촌 등에서 화염병을 던지었고, 울산의 극단적 노동운동가들이 극렬한 노동운동을 하였다. 그런 것들이 국민의 눈초리라는 자정능력으로 인해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5.16 쿠데타가 없었다면, 4.19혁명으로 인한 혼란도 이처럼 자정과정으로 수습되었을 것이다. 물론 혁명의 여파로 수습에 수년, 심지어 10년이 걸렸을지 모르지만 그랬을 것이라고 본다. 그랬다면, 비록 경제개발은 상당히 늦게 출발했겠지만 지금쯤은 현재의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 발 양보해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민주주의에 기초해 경제개발을 했다면 지금은 건전한 사회가 되어 탄탄한 대로를 걷고 있을 것이다. 즉, 군사독재의 후유증으로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인 부정부패, 지역감정, 대기업의 갑질 등이 없었을 것이라 본다. 또한 지금과 같은 강성노조도 없었을 것이고 역대의 부정부패와 그 정점을 찍는 박근혜-최순실게이트 같은 사건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권력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서로 감시역할을 하여 비합리적인 것이 발생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에서는 각종 민주단체는 물론, 국민 개인도 힘을 가져 서로 견제와 균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4.19혁명 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에도 경제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5.16쿠데타 세력이 그런 계획을 수행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들은 듯도 하다. 그렇다면 자정을 통해 혼란을 수습하고 건전한 민주주의에 기초해서 경제가 건실하게 발전하여 갔으면, 지금과 같은 5.16의 후유증을 앓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앞 세대로부터 튼튼한 나라를 물러 받았고 이에 우리의 노력을 보태어 미래에 튼튼한 나라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정과는 달리, 5.16쿠데타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워졌을까? 그 길은 아니 가본 길이라 더 좋았졌는지 더 나빠졌는지를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연 정화란 늘 좋은 방행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계파싸움만 하디시피하는 정치계, 극도로 악화된 지역감정,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극도의 갑질, 기업주의 종업원에 대한 극도의  갑질, 소위 헬조선이라 할 만큼 극도로 악화된 사회현상을 보면 5.16쿠데타 없는 길은 가봤어야 할 길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4.19혁명 후의 혼탁을 군사쿠데타로 인위적 정화를 한 탓이라  지금은 가고 싶어도 가 볼 수 없는 허망의 옛길이 되고 말았다.  


쿠데타로 인하여 계속 후진국으로 남거나 그 혼탁상이 지속되는 나라의 예는 많다. 이디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킨 우간다를 비롯해 아프리카에 그런 예가 많다. 아시아에서는 어쩌면 세계의 치빈국 중 하나인 벵글라데시라는 나라가 지금의 나라가 된 주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는 그 나라의 국민성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 나라가 인도의 도움으로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고 그 독립의 1증 공신이랄 수 있는 라만 수상이 국민의 힘으로 독립 후 혼탁을 자정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고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가 그 나라를 지금의 빈곤국 내지 후진국 중 후진국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또 그 잘 나가던 태국이 저렇게 혼탁해지고 미얀마(버마)가 저렇게 혼탁해진 것도 모두 쿠데타 후쥬증 탓이라고 본다. 터키가 지금도 쿠데타로 술렁이는 건 케말파샤라는 사람이 일으킨 군부쿠데타 탓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프리키와 아시아에만 유독 많지만 유럽에도 그런 예가 많없지 않다. 유럽에서 그런  두 나라를 꼽는다면 스페인과 러시아이다. 스페인은 프랑코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독재를 하여 유럽에서는 지금 후진국에 속한다. 러시아는 군대는 아닌지만 공산주의에 의한 볼세비키 혁명 후 공산당에 의한 독재로 지금도 유럽에서는 독재가 가능하고 가난한 나라가 되어 있다.


요컨대, 이승만이 독재를 하지 않았으면 조았겠지만,  4.19혁명으로 이를 타도한 후 발생한 혼란은 국민이 자정능력으로 수습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군부에 의한 5.16쿠데타로 지금 우리는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다. 



(2) 박정희 정치행위에 대한 평가


쿠데타는 그 성격상 장기집권으로 이어지고, 역쿠데타나 시민저항 나아가 시민혁명을 걱정해 장기독재로 이어진다. 그래서 박정희도 3선을 넘어 유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도 장기 독재를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노인은 노뇩으로 그래다가 물러났지만 박정희는 채류탄과 총칼 및 악법으로 계속 버티었다. 이승만이야 하야해도 그를 살려부었지만 박정희는 집권시 너무 많은 사람을 잡아 가두고 하여 하야했으면 살려두었을지 의문이다. 선거로 집권한 이승만과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차이이다. 그렇다고 이승만의 장기독재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첫 단추를 잘못끼운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5.16쿠데타란 길을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가보지 않은 역사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어쨌건 그건 알 수 없기에 백 번 양보하여 5.16쿠데타적 사건도 시대의 요청이라 하자. 그앞에서 말했듯, 군부쿠데타는 장기집권으로 이어진다. 지금이 아니라 옛날에도 그랬는데, 고려의 무신시대가 그 예이다. 또 프랑스의 나폴레온, 독일의 히틀러, 아프리카 우간다의 아민, 베트남의 고딘디엠  등(터키의 케말파샤도 군사정권 수립자이지만 그는 자연사하여 좀 다름)의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예로 보더라도, 군인이 크데타로  정권을 잡으면 그 정권을 쉽사리 내려놓지 않는다. 그래서 비극으로 비명에 갈 때 몰락하여 국민은 그런 무력정권에서 벗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김재규가 일으킨 궁정동의 한 방의 총격사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유신정권을 종식시킬 유사한 사건의 발생은 예견할 수 있었다. 김재규는 그 기간을 단축해 주었다. 그 점에서 김재규는 재조명 되어야 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


군부 쿠데타는 역사적 정당화가 없어 개혁의 이름으로 신선한 공약을 내거는 속임수를 쓴다. 그렇지만 일정한 기간에 그런 개혁은 이루어지지만 그에 만족할 수 없는 게 쿠데타이고 권력이다. 집권자에게는 권력을 내놓지 않는 인간의 본성이 발호하고 나아가 정당히지 못한 쿠데타로 인한 보복 때문에도 장기집권을 한다. 더구나 그 권력에 빌붙은 기생충 같은 간신배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장기집권을 하도록 부추기며 귀와 눈이 막한 집권자는 장기집권을 한다. 그게  어려워지면 더 악독한 방법을 사용하여 되돌아 올 없는 루비콘 강을 넘게 된다. 그게 역사적 교훈이다. 쿠데타가 그 당대에만 끝나는 게 아니라 구 후유증이 지속된다. 5.16쿠데타의 후유증으로 우리는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을 경험했다. 그 결과 있어서는 안 될 대학살인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했다. 그러고 보니 1961년 5월 16일의 쿠데타로 혼탁해진 나라가 자정되는데 김영상 출범인 1992년 2월 25일까지 30여연이 걸렸다.


아참, 5.16쿠데타의 후유증은 김영상의 민간정부가 탄생한다고 끝나지 않았다. 진보를 빨갱이라 하고 보수를 수구꼴통이라고 이념적 공격이 정치판에 난무하는대 그게 다 5.16쿠데타의 후유증이다. 나아가 그 후유증이 정화되지 않아 박근혜-최순실 사건으로  나라는 국격을 잃을 정도가 되었다.다시 말해, 그 30여년의  군사정부이 종식에도 그 후유증이 정화도지 않아 아직도 설익은 문민정부들이 그런 증세에 취한 정치를 하여 말이 민주화된 국가라 하지만 실질적인 성숙한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하다. 지금도 이승만의 잘못된 첫 단추끼우기 정권으로 인해 4.19로 일어난 혼란이 5.16로 더욱 혼ㅌ착해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 후유증은 5.16의 주역이나 그에 적극적 내지 묵시적으로 협력한 자들의 자손이 여야의 주도권을 잡고 그때 어땠느니 독재자의 딸이니  하고 잘 하느니 못하느니 서로 비생산적으로 비난하며 대치하는 게 오늘의 한국정치이다. 즉, 5.16의 후유증으로 부정부패, 갑질, 정쟁이 아주 심해지고, 그 중에서도 지역감정은 5.18민주화운동을 발단시키는 것으로 이어져, 이런 후유증을 완전히 치유하는 데 앞으로 얼마나 더 긴 역사가 필요할지 모른다. 다른 면도 다 그렇겠지만 정치적으로만 보더라도 이나라가 상도동계니 동교도계니 하는 군사정치 하에 뭉침인 파당현상이 지금도 친노니 친박이니 친문이니 비노니 비박이나 하는 것으로 남아 있다. 군사문화 잔재의 이 파당현상은 당내에서는 물론 당간에서도 맨날 싸우는 정치판이라 5.16의 후유증은 앞으로 수 10년간 아니면 수 100년간 노력해도 고쳐질지 모르겠디. 어쩌면 영원히 정화되지 못할지 모른다. 5.16으로 자정능력의 상실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이리라.  


위에서 말한 모든 게 5.16만쿠데타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유교란 이름으로 불리는 공자 사상 때문에 발생한  역사적 당파싸움이라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습성도 이에 기여했을 것이다. 왜 공자타령이냐고? 공자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임금의 부인이 죽으면 3년상이니 1년상이니 하는 예절이라는 형식에 매달려  말도 안 되는 싸움을 일삼았다. 지금도 우리의 정치판이나 사회에서는 실질이 아니라 형식문제로 싸운다. 이런 형식적 문제는 공자의 가르침에 나와 있다. 왕에게는 왕이라는 형식에 대해 복종하고 부모는 부모라고 형식에 대해 복종하고 스승은 스승이라는 형식에 대해 복종하여야 한다는 게 그의 가르침 말이다. 권위주의는 공자에 의한 가르침의 근저라는 말이다. 이게 나만의 천진한 생각일까? 글쎄다.


그런 형식에 근거한 싸움 중 큰 것으로 지역이란 형식에 근거한 지역감정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의 지역감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있으나마나 하는 수준이었다. 지금처럼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지역감정 싸움은 없었다. 싸움은 정치판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많다. 그 전형적 싸움의 예는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나타난다.  조그마한 접촉 사고만 일어나도 질못한 자는 없고 네 잘못이니 아니니 싸운다. 다치지 않아도 의원이나 병원에 드러눕는 게 우리 국민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형식상 유리한 입장이 되는 당사자는 그 유리한 입장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 우리네 사회이다. 또 길거리에 누구와 어깨와 부닥쳐봐라. 어깨를 부딪친 사람이 사과하지 않을 때 이를 지적하여 보라. 그 지적받은 사람이 지적한 사람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은 데 왜 시비냐?"고 시비를 걸거나 심하면 "네가 부딪치지 않았느냐?"라고 뒤집아 씌우며 싸우려 든다. 이런 현상은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  직접적 증거가 없다는 형식을 이용하거나 자기가 채력적으로 더 강하다는 비인격적인 사고에 기인한다.


 4.19혁명 후 5.16쿠데타만 없었다면, 민주주위가 발달해 민주주의에서는 국민 개인적 내지 집단적으로 힘을 가져 서로 견재하고 군형을 잡아 위와 같은 사회현상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지금쯤은 상당히 사라졌을 것이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부정부패, 지역감정, 대기업 갑질, 기업주에 의한 갑질, 강성노조와 귀족노조의 탄생은 없었거나 약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건 5.16이 없었다면 갔었을 길은 아니 가본 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내 이런 주장이 현실적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내 주장이나 예측이 비판 받을 수도 있지만, 건전한 비판은 생산적이라 좋다. 나의 이 비판이 동참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비핀도 생산적이면 좋을 것이다.


어째건 5.16은 일어났다. 이게 가본 길이다. 가본 길이니 이걸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런 전제 하에서 박정희가 경제개발을 한 것은 칭찬해줄 만한 일이다. 그래서 백 번 양보해 그가 3선개헌으로 대통령이 된 것까지도 그렇다고 치자. 그렇게 양보하더라도 경제개발로 인한 효과를 이용해 그가 종신대통령 욕심으로 만든 유신정권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경제개발을 보고 "당신은 종신 대통령이 되어야 할 자격이 있다."고 하는 어쩌면 잘못된 신호를 국민이 보내서 그가 종신대통령의 용심을 부렸을까? 아니다. 그 정권에 대한 많은 저항이 있었다. 그래서 말 없는 대다수의 국민이 "그래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하고 유신헌법에 동의한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니다. 자기가 경제개발의 업적을 내세워 다분히 의도적으로 유신정권을 만든 것이라고 본다.  군대, 정보부 및 경찰력으로 튼튼한 힘의 장막이 박정희 자신을 굳게 지켜주리라고 믿었음이 그 길을 서슴치 않고 가려했을 것이라고 본다. 군사 독재자들이 대부분 갔던 마지막 길을 그도 가고 말았다. 3선만 하고 말았으면 그 길을 피했을 것이었건만.


경제개발의 업적만으로 종신대통령은 커녕 장기집권가 바람직하지 않나는 역사적 교훈도 존재한다. 예컨대, 미국에서 그토록 참담했던 대공항이 1929년경에 일어났을 때 루즈벨트(Roosevelt, 영어발음: 로우즈벨트이지 루즈밸트가 아님)가 대통령으로 뽑혀 그가 이를 해결하여 4선까지 했다. 워싱턴이 세운 두 번의 대통령이라는 전통을 무력화시킨 그를 보던 국민은 그가 죽자마자 누구도 2선 이상은 못하도록 하는 헌법개정을 해버렸다. 그 전에는 워싱턴이 세운 전통인 관습법으로 대통령은 2선까지만 할 수 있었는데 루즈벨트의 장기집권을 보고 미국국민은 이제 그 2선까지만 한다는 것을 명문으로 헌법에 포함시켰다. 또한 루즈벨트가 4선을 해서인지 오늘날의 미국인 누구도 그를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가 2선만 했으면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시애틀에서 어떤 거리의 악사(미국에서는 그 사람처럼 거리악사라는 게 좋아 그걸 하지 노숙자가 아닌 살람이 많음.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는 DAG라고만 했고 Georgia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다 함. 몇 년 전에 그를 찾아가니 그 얼마전 어머니 생일에 몇 년전엔가 갔다 왔다 함)에게서 들은 이야기이고 다른 미국인에게도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라면 워싱턴과 링컨 정도다. 케네디 대통령은 재직  중 큐바(영어발음: 쿠바)문제를 해결한 데 대한 평가와 재직 중 암살당한 것에 대한 동정심으로 비교적 평가를 잘 받고 있다고 하는 정도이다. 


박정희가 유신정권을 만든 것은 그 당시 그래서는 안 된다는 묵시적 또는 명시적 국민적 신호와 기존의 역사적 교훈을 못 읽었거나 제대로 읽었더라도 3선 개헌 후 4선이 불가한 것을 알아서 국민의 선택을 피하는 방법으로 장기집권(어쩌면 종신집권)을 시도한 것이 유신이었으리라. 다시 말해  종신 대통령이 되기엔 경제개발 업적로는 역부족이라 그 경제개발이란 업적을 이용해 종신집권을 노려 만든 게 소위 유신헌법이다. 이렇게 헌법을 만들기 직전 그 당시 관보역할을 한 어느 신문에선가 프랑스식 헌법에 대한 기술을 읽은 적 있다. 그런 프랑스 헌법에 의한 프랑스 대통령보다 그는 더 강력한 대통령이 되고 그것도 쉽게 그렇게 되는 방법을 도입했다. 전문적 정치인보다 소신이 적은 사람의 집단인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쉽게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방식을 유신헌법에 도입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만들 목적으로 그 헌법을 만들었다고 보는 증거로는 충분하다고 본다. 아무리 양보해  5.16가 시대적 요청이라 하더라도, 5.16은 쿠데타이기에 정당성이 결여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경제개발을 시작하였으니 3선까지만 한 후 조용히 자기 역할을 마무리를 하고 다음 대통령 뽑기를 국민에게 맡기었으면 그의 정권은 태생적 전통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대적 요청이란 이유로 지금도 인정받았을 것이다. 아마 그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5.16쿠데타도 그가 붙이고자 한 혁명이란 것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존경할 만한 군인출신 전직 대통령을 모시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나도 그를 그렇게 생각했을지조 모른다. 비록 정당성은 결여되어도 말이다. 케말퍄샤가 터키에서 존견받는 것처럼 말이다.


장기집권은 군부로 인한 집권이 아니라 민간독재로 인한 것이라도 나라랄 망하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우리보다 경제도 좋았고 아시아세서 잘 나가던 촉망되는 나라였다. 그 당시에는 베트남도 그러했다. 그런데 필리핀은 마르코스라는 수재형 인간이 장기독재를 하는 바람에 지금 아시아에서 최빈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 북한도 풍부한 자원과 전기 등 인프라가 좋아 70년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다. 북한은 일본에서 해방된 후 가진 그런 잔연적인 부를 우리 한반도인을 행복을 위해 사용한 게 아니라 그들을 죽이기 위해 6.25일으켰다. 장기독재를 하다 못해 왕조와 같은 정권세습을 하여 이를 유지하기 위한 장기 독재로 우리보다 몇 십분의 1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나아가 그 가난 속에서도 주민이야 굶어 죽든 말든 다시 한 번 한반도인을 멸망시킬 핵개발에 조금이나마 남은 부를 사용한다. 아, 한심한 한반도인이야! 남에서는 지역감정으로 죽일 듯 싸우고 북에서는 우리 한반도인을 말살시킬 일만 꿈꾸는구나!


다시 박정희의 장기집권의 이야기로 돌아가. 그는 간신배의 장막으로 둘러싸여 그 장막을 구성하던 족속들도 그 장막으로부터의 이득을 계속 즐기고자 박정희에게 계속 대통령을 계속하라는 눈과 귀를 가리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국민이 장기집권을 요구한다고 했을 수도 있었다. 아닌 것은 알았겠지만 이미 너무 많이 나간지라 물러나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판단해서 물러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인의 장막이 모두 독재로 인한 장기집권의 결과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인권탄압을 하고 물러나면 후임이 어떤 형태든 그를 심판하려 했음을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3선 이전에 물러났으면  그런 보복을 할 일이 없었으니 좋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쩌면 경제개발이면 그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물러나지 않은 이유를 더 추리할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그는 그가 일으킨 경제개발의 효과가 자기 혼자만의 덕이란 것을 확실히해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후임 시대에 경제가 더 나아지면 자기 것이 묻혀가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짐작이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의 장기집권 동안 극렬한 저항으로 훈련한 운동권이라는 세력과 이 운동권을 눌러왔던 습관에 젖은 잔존 집권 세력 및 후손들로 된 세력 간에 지금도 사사건건 부딪친다.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는 여기도 싸움, 저기도 싸움이고, 국회에 톱이 쓱싹거리고 똥물이 튀었고 최류가루가 날리었다. 그 결과 소위 국회선진화법이란 이상한 국회후진국법 역할을 하여 국회는 식물국회 같기도 하다. 그 법이 있어도 지금처럼 문제지만 없어도 날치기 법통과가 이루어져 문제는 여전했을 것이다. 이게 아마도 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기회를 앗아간 5.16 탓이리라.



(3) 박정희 제정책에 대한 평가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좀 살펴보자. 우리는 그의 덕에 지금까지 잘 나갔다는 건 맞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잘못된 경제정책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그는 일본식 방식으로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했다. 대기업 중심 정책은 자동차, 배 등의 중공업을 개발할 수 있어서  가시적 효과가 커서 앞으로도 늘 잘 되어 가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비해 고용효과가 적어 취업의 약 90% 정도를 중소기업이 책임을 진다. 여기도 가게 저기도 가게. 또 여기도 중소기업 저기도 중소기업 아닌가! 이런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갑질로 인해 임금의 차별, 능력이 부족한 사람만 간다는 인식 등으로 4년제 대졸자 중 중소기업에 취업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


사실상 모든 제품은 중소기업들이 만든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부품과 그 핵심기술은 중소기업이 가진다. 그러나 대기업의 갑질로 중소기업은 이익이 적어 노동자들에게 안정적 직장과 웬만한 임금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너도나도 대기업에 들어가려 한다. "우리 아들은 대기업에 다닌다."는 식으로 대기업 다니는 아들을 가진 부모는 자랑스러워 하고 딸을 가진 부모는그런 사람을 사위로 삼고자 한다. 지금 같이 경제가 어려울 땐 대기업은 비용절감이란 이유를 들어 더욱 낮은 가격으로 납품하라고 중소기업에 강요한다. 그래서 죽는 건 중소기업이다. 환율이 올라도 대기업은 그 환차익을 중소기업과 공유하지 않고, 환율이 내리면 환차손을 중소기업과 공유하려 하거나 모든 손실을 중소기업에 떠넘기려 한다. 중소기업의 비애이다.


대기업 중심정책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갑질문화와 더불어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갑질을 너무 심하게 하여 이를 없애고자 경제민주화란 이상한 용어가 등장하였다. 그것을 기치로 내걸어 대통령이 되는데 기여하기도 하고 또 그걸 기치로 내걸어 여당 대통령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이 야당의 임시수장으로도 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이르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경제가 어려울 때 중소기업이 직면하는 것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가능성이다. 경제가 잘 나갈 때는 잘 나가는 대로 직원 구하기가 어렵다. 중소기업은 이래저래 어렵다. 우리의 이런 현상은 중소기업이 주가 되는 대만, 스위스 등에서는 지금도  경제적 문제가 별로 없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세계경제가 어려울 때에, 비록 대기업에 적절한 신규 대규모 공사가 없어 경제가 어렵더라도 대부분의 기술은 중소기업이 보유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기존 설비를 위한 부품을 교체할 수는 제품을 생산하여 이들 중소기업은 살아남을 수 있다.  한 중소기업이 망해도 해고된 종업원이 적어 그 흡수가 쉬워진다. 박정희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동시에 폈더라면 이처럼 경제가 나쁠 때라도 콧노래를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또한 안 가본 길이 되었지만, 가보았어야 했던 길이었고 지금이라도  이 점을 보완하여 나가야 할 길이다. 



(4) 박정희 노동정책에 대한 평가


이제 박정희의 노동정책을 살펴보자. 그의 경제정책은 경제개발지상주의이다 보니 인격이나 노동권은 무시 내지 억압대상이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강압에 내성이 생기어 강성노조가 되었다. 이들 강성노동자들은 귀족노동자가 되어 춘투 등의 투쟁으로 고임금으로 인해 우리 경제를 어렵게 한다. 해고를 어렵게 하여 고정비용화되어 제품가격의 상승으로 국제적 경쟁력의 저하로 우리 경제를 어렵게 해왔다. 기계야 고철값이라도 가지어 일부 부채를 변재할 수 있지만, 강성 및 귀족 노동자는 팔 수도 없는 높은 고정비용 요인이 되었다.


강성노조는 크게 두 가지 대체 현상으로 나타나 고용에 문제로 나타난다. 첫째는 기계화(machinization)이다. 기계화가 되면 그만큼 노동력이 불필요하다. 대기업의 기계화는 더 심화되고 그 결과 대기업의 고용효과는 더 줄어들었다. 둘째, 강성노조는 견직을 포함한 비정규직로 노동력을 충당하려 한다. 지금 세계는 어느 정도 아웃소싱이란 추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보면 된다.


노동자를 무시한 과거에서 형성된 잘못된 노사관계는, 경제개발이란 기치 아래 민주주의를 무시하여 국민을 무시했듯, 약자인 노동자를 완전히 무시한 박정희의 잘못된 경제개발지상주의적 노사정책에 책임이 있다 할 것이다. 그 후임들은 이처럼 잘못된 노사관계를 수정할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은 것도 지금과 같은 강성노조, 귀족노조의 존속에 책임이 없다 못할 것이다. 나아가 야당이었다가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 그의 정치적 기반의 일부를 이런 노조에 둔 탓으로  이런 문제를 무시하거나 오히려 그들의 지지에 편성하기도 했으리라. 이를 바로 잡기에 앞으로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후세들이 거의 반 영구적으로 지불하여야 하는 비용일 것이다. 고통으로 지불할 비용이란 말이다.


박정희 시대의 노동 정책은 또 아니면 모인 노동운동을 하도록 학습시켰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도 노동운동을 하는것이다. 포크레인 위에서 공공농성을 부린다거나 춘투 같은 걸 한다거나 하면 당사자나 지휘부는 노동자 사이에서는 영웅이 되거나 하지만 고용주는 정규직을 뽑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도 자금 자숙해야 한다. 우리 기술은 초고속 기술의 일본과는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는 건 누누가 안다. 그런데 노사가 같이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고정비용화된 노동비용으로는 중국의 저임금 고기술과 경쟁할 수 없다는 현상이 지금의 현실이다.



(5) 박정희 지역감정. 음서제, 부정부패등의 영향에 대한 평가


1. 지역감정: 박정희로 인한 지역감정의 평가는 어떨까? 독재나 장기 집권은 통치자의 출신지역에 권력이 배분되어 지역감정이 새로 발생하거나 기존의 지역감정이 심화된다. 그런 정권으로 우리나라에서 부마사건을 거쳐 종국에는 5.18민주화운동까지 발생하거나 심화되었다. 장기적 독재정권의 이런 것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라크의 특정 지역이 그랬고 북한의 평양주민이 다른 지역 주민에 비해 지역감정의 우월성을 즐기고 있다. 이 지역감정은 뒤 VI. 김영삼과 김대중의 역사적 소고 (3) 김대중 부분에서 더 설명할 것이다.


2. 부정부패: 부정부패는 독재국가, 그것도 장기집권일 때는 필요악처럼 등장한다. 그래서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일 것이고, 부패한 나라에는 중국도 포함된다. 그래서 시진핑이 이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우리나라의 부패는 역사적 문화 탓도 있지만,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이어진 결과이다. 특히 박정희의 집권기간은 최장으로서 시간이 갈수록 더 독재화되어 부패가 더 심화된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독재정부는 왜 부패하는가? 통치자가 통치자금을 조달하느라 위층부터 부패한다. 그 부패의 바이러스는 우선 통치자금조달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떡고물로 감염되어 그들이 나중엔 적극적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그렇게 자란 바이러스는 감염의 중간 숙주가 된다. 그리고  곧 그 바이러스는 나라 곳곳에 침투하여 감염시킨다. 그래서 조그만한 일을 해도 청탁이 필요하다. 청탁하면 쉽고 안될 것이 없는 게 독재정권이다. 북한에서도 돈만 있으면 안되는 게 없다 하지 않는가! 몇 년 전 중국의 연변대학 의대 여교수를 만나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인 즉, 그 대학 의대교수를 할려면 연줄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교수하려하는  대학에 아버지가 교수로 있거나 그 지역 당 고위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를 못한 친구가 의대 좋은 학과 교수를 하는데 자기는 별로 인기가 없는 병리학의 교수가 되었다 했다. 그래서 한국의 한 의대에 와서 역학분야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라고 했다. 중국도 이처럼 썩었지만, 그래도 중국은 중요한 자리에 중요한 학문적 소양이 깊은 사람을 앉히는 대담함도 보인다. 더구나 미국 등에서 활동하던 화교 등 학자들도 자진하여 중국으로 간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중국은 지금 달나라에 인공위성을 쏘는 실력과 스텔스기를 일본보다 앞서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는 외부수혈이 가능하여 이룬 업적이다. 우리네는 유능한 교수르 배척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완화되었다지만 조금 진척이 되었을 뿐 갈 길은 요원하다. 나이가 내가 이 대학 무슨 학과의 대장인데 선배를 새로 받으면 모실 사람이 생겨 싫다느니 하는 게 실질적 이유이다. 그러나 말로는 젊은 사람이 미래 발전을 위해 좋다는 형식상 핑계를 댄다. 학문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나는데도 말이다.


3. 음서제도: 부정부패는 돈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관직 등 자리에서도 발생한다. 이는 돈과 관련된 부정부패보다 사실 더 나쁜 것이다. 능력부족의 인사가 고위직에 앉았다 생각해보자. 나라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면 그 영향을 돈 관련 부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어쨌건 인적부패가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음양으로 발생하는 음서제도가 그것이다. 현재 많은 국회의원이 별 일 없이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하거나 정치 거물이어서 국회의원도 하고 도지사도 하고 그 이상도 하고 그런다. 미국 같으면 어떤 분야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기 전에는 아버지가 거물이라 하여 아들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들 부쉬는 그가 운영한 기업에서 성공을 했다. 아들 부시의 동생인 젭 부시는 비록 이번에 대선주자로 하차하기는 했지만 플로리다 주지사였고 일도 잘 했다는 평을 들었다.


우리나라 음서형 비리는 여러 형태로 일어난다. 고시제도가 없어지자 국회의원이 자식의 로스쿨 졸업에 관여하고  일부 공직자들이 자기 아이들의 군대문제와 취직문제도 적절히 해결하고 청문회에 나오는 사람치고 썩지 않은 사람이 없다. 대쪽 같다던 대통령 후보들조차도 아들의 군대문제에 그랬다지 않는가? 음서제는 사기업의 노동자에게도 일어나 어떤 대기업에서는 기존 노동자의 아이들이 아버지 자리를  잇게 만들었다. 주인이 강하지 못한 기업, 예컨대, 삼강아이스크림, KIA, 하이마트 등은 살아남지 못하고 대기업에 흡수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노동자는 주인의 눈이 돌아가면 기업 돈을 빼돌리는 건 신문에 많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기업의 창업주와 그 후손은 자식들에 기업을  물러주려 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창업주 자식에 대한 세습이라는 음서제가 발생하고 그 결과 금수저 현상이 만연하다. 즉, 기업주는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을 제치고  창업자의 어린 자식들이 대대로 그것도 때로는 몇 살 안 되어 최고경영자가 된다. 이런 현상은 북한에서 3대 세습통치가 되고 김정은이 20대에 최고통치자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나아가 가족 내에서도 싸움이 일어나, 기업내 형제가 경영권 싸움으로 시작하더니 일반인도 유산싸움을 하느라 형제간에 치열한 싸움을 마다 않는다. 이는 김정일과 김평일 사이의 싸움, 김정은과 김정남 사이의 싸움 등과 다를 바 없다. 기업은 또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다가 지금처럼 자식 하나에 기업 하나씩을 물려준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 자손이 많아져 국내기업 모두가 몇몇 가족의 후손들의 소유가 될지도 모른다. 위의 부정부페에서 말했듯, 학문 발전에 생기는  교수의 임영문제에도 음서제가 있다는 등등 음서제가 여기저기 발생한다. 불평 같은 지적은 이만 하자. 그 대신 소리지르자. Alas!라고.



(6) 박정희 대한 전반적 결론


이제 결론을 간단히 내려보자. 박정희에 대한 결론은 출신지역과 연령대에 따라 크게 다르다. 과거 못살던 때와 비교하는 과거지향적인 사람에게는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생긴 부작5용으로 미래를 보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들에게는 그는 현재의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다. 일정지역에 기분을 둔 생각도 이처럼 평가가 확연히 서로 다르다. 그를 무조건 좋아하는 지역출신의 사람은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그를 무조건 싫어하는 지역출신의 사람은 그는 현재의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한다. 중립적 입장에서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4.19 다음의 다른 길은 가보지 않은 아쉬움을 차치하고서라도, 또 백번 양보해 5.16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해도, 앞의 이승만의 결론에서도 말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기업으로 치면 벤쳐기(Venture bisiness)의 창업을 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이승만은 정부수립, 박정희는 경제개발 시작)은 가졌다. 그러나 그 기업이 대기업이 되었을 때 이를 운영할 능력이 부족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개헌(이승만의 3선, 박정희의 3선개헌과 유신헌법)을 해준 것은 역사적 역선택(잘못된 선택)이었다. 이들 둘이 통치한 시대는 너무 길었고 그 후유증이 너무 크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그 긴 시간 탓으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아쉬움으로 남기기엔 정말 아쉽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Frost)가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란 넋두리 시처럼, 내가 지금  역사에 대해 그런 넋두리 시를 쓰고 있는가 보다.